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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민 Feb 21. 2024

천둥벌거숭이 같던 신입시절


내가 근무하던 곳은 세 개 부서가 한 사무실을 썼는데, 두 개 부서는 앞 편에서 말한 언니(그 당시에는 직급별 호칭이 없었다)들이 이사 커피도 타고, 문서 타이프 치는 업무를 주로 했다.


난 교육용 교재 제작부서로 들어갔는데, 입사할 때 대부분 외주를 주고 책이 나오면 전국 지사 교육장에 배부하고 관리하는 것이 내 업무라고 들었다. 부수는 종류별로 합쳐서 연간 100만 부 정도 되는 꽤 많은 분량이었다.


당시 내 사수 민상선배는 업무와 관련된 법령집 한 권과 교육용 교재를 공부하라고 주고, 회사와 관련된 뉴스와 매일 오는 관보 스크랩을 시켰다. 중요 내용을 칼로 오려 바인더에 붙이기였다.


관보(官報)는 법률 제개정, 예산, 대통령 지시사항, 인사발령 등 국가가 국민에게 알릴 사항을 수록한 공고 기관지다. 예전에는 양면 약 20쪽 분량으로 매일 인쇄물로 배포했지만 지금은 전자관보로 바뀌었다.

 

하루에 2~3시간이면 끝냈기 때문에 "선배님 일 좀 주세요."라며 쫓아다녔지만 그게 나의 업무란다. 물론 지루했다(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좀 즐길걸).

내 실력을 못 믿는 것 같아 불안했고, 무엇보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노는 사람 취급하며 "팔자 좋네."라고 했다.

너무 심심해서 관보를 보면서 법률 개정 내용은 신구조문 대비표를 만들고 요약을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는 하기 싫고, 하기는 해야 할 때 참고서 요약정리가 취미였다.

매일 하다보니 법령이 저절로 외워지고, 교육용 교재도 어차피 법령을 쉽게 풀어 설명하는 것이라 30년 직장생활에 가장 큰 기본기가 되었다. 글쓰기 실력도 그때 늘었던 것 같다.

민상선배한테 배웠던 행정도 평생 어느 누구한테 듣지 못한 귀한 가르침이었다. 몇년 전 퇴직하셨지만 늘 우러러 섬기는 내 평생 은사 같은 분이다.


컴퓨터가 없던 90년대 초에는 대부분의 글을 원고지에 썼다. 교재를 만들기 위해 외부 전문가에 의뢰한 원고가 오면 언니들이 타이프를 쳐서 인쇄소에 넘겼다.


민상선배는 평소처럼 원고뭉치를 언니들에게 주고 타이프를 쳐달라고 했다.

그런데 언니들이 반기를 들었다. 그 부서도 <여!직!원!>이 있는데 왜 본인들한테 시키냐는 항의였다.

상사들한테 이쁨을 받던 민상선배는 부장과 이사를 등에 업고 ‘그 업무가 당신들이 할 일’이라고 맞받아쳤지만 '다른 부서'라는 이유로 먹히지 않았다.

나는 죄도 없이 가시방석이었다. 자존심도 상했다.

입사 면접 때 영어, 일어 타자칠 줄 아냐고 물었던 생각이 난다. 면접장을 쓰윽 둘러보니 타자기가 보이지 않길래 설마 쳐보라고 할까 해서 조금 칠 줄 안다고 거짓말했던 기억이 난다. 아뿔싸!


그날 압구정 현대아파트에 사는 친구 하은이네 집에 들러 낑낑거리며 아버지가 쓰시던 오래된 타자기를 빌려왔다.

눈동냥으로 언니들을 지켜봤기 때문에 타자기 치는 원리는 어느 정도 알았지만 쉽지 않았다.

1994년부터 한컴타자연습이 나오고 한글과컴퓨터 회사에서 '한글타자왕 선발대회'도 했지만 90년대 초반에는 대부분 여상에서 주산, 부기, 타자를 배우고 자격증을 가진 베테랑 언니들이 왕이었다.

공문 기안을 하려면 언니들 손을 빌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1인 1컴퓨터 시대는 상상도 못 하겠지만 사무실에 한 두대밖에 없는 타자기는 언니들 몫이었다.

 

양쪽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만 가지고 일주일 동안 타자기를 부여잡고 타자 연습을 했다.  

자판을 두드리면 쇠뭉치가 앞으로 튀어나오며 종이에 글씨가 찍히고, 왼쪽의 갈고리 쇠를 이동시키면 다음줄에 글자가 찍히는 게 아주 재밌었다. 다다다다 경쾌한 자판소리도 좋았고, 무엇보다 오른쪽이었던가 어떤 키를 누르면 주르륵 글자가 지워지는 기능도 있었다.

치명적 단점이라면 치다가 그 자리 글자 삭제는 가능하지만 A4용지 한 장을 다 치고 교정 보면서 나온오타는 흰색수정액으로 고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퇴근 후 저녁밥도 제치고 타자연습을 하고, 처음 당구칠 때 누우면 천정이 당구대처럼 보인다더니 나도 방안 벽지 무늬가 죄다 한글자판으로 보였다.


이를 갈고 연습한 결과, 나의 타자 치는 솜씨는 일취월장했다. 타자기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한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리던 민상선배를 밀어내고 다다다다 원고를 쳤다.

홍언니와 김언니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지금도 내 타자 치는 속도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 독수리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수명이 긴 독수리는 부리와 발톱, 깃털이 닳고 무뎌져서 사냥을 할 수 없는 마흔 살 정도되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기가 온다고 한다. 이대로 살다가 죽을 것인지, 스스로 부리를 바위에 부러뜨리고, 그 부리가 다 자라면 부리로 발톱을 뽑고, 새로운 발톱이 자라면 마지막으로 낡은 깃털을 뽑아내고 새 깃털이 돋아나면 용맹스러운 독수리 본연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이 매우 고통스럽고 굶주림의 시간이 길기 때문에 그걸 다 견디고 변화에 성공한 독수리가 일흔 살까지 두 번째 삶을 산다.


난 네 손가락으로 타자기에 열정을 쏟고 인고의 시간을 지나 비로소 안정감을 느꼈다.    


* 오늘 연재의 교훈 *

독수리타법이면 어때? 빨리치면 되지!(800타 이상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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