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짝사랑
*
강릉에서 서울까지는 차로 약 세 시간이 걸린다. KTX 기차를 타면 서울역까지 두 시간 만에 도착하겠지만 너무 빠르다는 점이 부담스러웠다. 기차 대신 고속버스를 선택한 것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목요일 오후의 고속버스는 막힘 없이 영동고속도로를 내달릴 것이다. 서울에 다다라 퇴근 시간과 마주하면 도착 시각이 조금 지연될지 모르지만 크게 늦진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이제 세 시간이 주어진 셈이다.
J와 강릉으로 출장을 오게 된 건 순전히 내 계획이었다. 나 혼자 올 수도 있었지만, 업무를 도울 어시스턴트가 필요하다고 회사에 보고했고, 별다른 무리 없이 함께 오게 됐다. 강릉. 특별한 기억이 있거나 의미가 있는 도시는 아니다. 다만 일을 마치고 잠깐 짬을 내 바다를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출장 업무에 특별한 의미가 없었던 만큼 그 시간도 무의미하게 지나갔다. 지점 관계자와 이야기 나누고 서류를 전달하고 그들의 말을 메모한 뒤 같이 밥을 먹는다. 매달 한차례 지방 지점을 다니며 관리하는 게 내 일이기 때문이다.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지만, 그래도 지점 관계자를 만나 교감하라는 본사의 방침은 한 달에 한 번 나에게 뜻하지 않은 여행을 준다.
일을 마치고 J와 잠시 들른 해변은 1월의 차가운 바람과 매서운 파도로 자신의 모습을 숨기려는 것 같았다. 그게 마치 내 모습 같아 보여 안쓰러움이 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J에 대한 내 마음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여 덜컥 겁이 났다.
해변에서 오래 걸리지 않아 터미널에 도착했다. 고속버스 창가 자리에 앉은 J는 내게 안전벨트를 가리키며 버스가 곧 출발할 것 같다고 말한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내 모습이 이상했는지 J는 생글생글 웃으며 손바닥을 펴 내 눈앞을 위아래로 움직인다.
“과장님 아까 바다에서 너무 추우셨나 봐요. 피곤해 보이세요.”
나보다 여섯 살 어린 J가 회사에서는 그저 어른처럼 보였는데, 이렇게 웃으며 장난치니 어린아이 같다. 회사 선배와의 출장이 어려울 수도 있을 텐데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다. 모두에게 친절한 J를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J가 모두와 친하게 지내는 것은 아니다. J는 적당한 간격을 두고 제한속도를 지키며 주행하는 모범 운전자 같은 사람이다. 깜빡이를 켜지 않고 끼어들거나 무리하게 과속한다면 결코 J와 친해지기 어려울지 모른다.
좌석의 삼분에 일도 채워지지 않은 평일 오후의 서울행 고속버스 출입문이 닫혔고, 버스는 금세 강릉 시내를 벗어났다. 세 시간. 고속버스 안에서 둘만의 시간. 우연스럽게 함께 가게 된 출장임을 강조했지만 어쩌면 J는 눈치챘는지 모른다. 전부터 바다가 보고 싶다던 J의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고, 이번 출장지가 강릉으로 잡히면서 J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좋은 기회였다. 낯선 곳. 잠깐의 이탈. 아무도 모르게 J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가운 시간은 나의 망설임을 기다리지 않았고, 바다는 용기 없는 나를 못마땅해하며 도시로 내쫓고 있다.
*
나는 '소년 과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우리 부서의 업무 대부분을 도맡아 하는 데서 소년소녀가장을 내 직급에 갖다 붙인 것인데, 사람들은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는 내 얼굴 때문에라도 잘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내게 동안이라며 부럽다고 말하지만,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서른 후반이라는 나이를 말하면 깜짝 놀라곤 한다. 나는 이런 내 이미지가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다. 나는 그냥 내 나이로 보이는 게 좋은데.
평소 친하게 지내는 K대리는 내게 머리를 넘겨 이마를 드러내는 올백 스타일로 소년다움을 벗어나 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나이가 들어 보일 것이라고. 그래서 한동안 머리를 짧게 깎아 세우고 다니기도 했다. 또 캐주얼 옷 대신 굳이 정장을 고집했다. 그런 내 행동을 본 부장님은 어려 보이는 것도 능력이라며,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은 머리를 절대 세우지 않는다. 또 진지해 보이는 검은색 뿔테 안경을 벗고 렌즈를 끼우고 다닌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J가 인터넷으로 남자 연예인 기사를 보며 K대리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어서부터였다.
“도대체 연예인들은 뭘 먹어서 이렇게 동안일까요? 아, 나도 어려 보이고 싶다.”
퇴근 후에는 퍼스널 트레이닝으로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평소 관심에도 없던 쇼핑을 하고 주말에는 피부과를 예약했다.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년에게 묘한 감정이 생겼기 때문이다. 짝사랑.
J를 알게 된 지는 일 년 정도 된 것 같다. 작년 봄 입사한 J는 우리 팀에 오자마자 근무에 투입되었다. 교육을 받거나 적응할 틈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퇴사와 출산 휴직으로 우리 부서에 빈 자리가 두 개나 되면서 한창 정신없는 시기에 들어온 터였다.
다행히 경력 이직자였던 J는 금세 적응하며 팀의 일원으로 역할을 해내기 시작했다. 팀을 이끌어야 했던 나는 힘든 시기 열심히 따라와 주는 J가 고마울 뿐이었다.
사람이 부족했던 탓에 몇배로 늘어난 업무량을 처리하기 급급했고, 부서가 다시 안정적으로 굴러가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휴대전화 게임과 주식으로 업무시간을 보내는 부장님에게 딱 하나 고마운 게 있다면 바로 J를 뽑아준 것이다.
머릿속엔 오로지 일 뿐이었다. 아침에 눈 뜨면 세수하고 양치하면서 오늘 해야 할 일을 떠올렸고 출근길 지하철에서는 업무자료를 읽거나 아이디어를 메모했다. 일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에 시선을 줄 만한 여유가 없었고 그렇게 일에 빠져 사는 내 모습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그 시절 J는 내게 없었다. 일에 치여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또 야근에 휴일 출근으로 매일 같이 마주치면서도 착한 후배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않았었다. 간혹 둘이 점심을 먹으면서 다른 부서 누가 고백했고, 거래처 누가 자꾸 연락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처신하면 좋을지 상담해 주던 게 불과 두 달 전이었다. 최근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와 사귀기로 했다며 수줍게 공개했을 땐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영화 예매권을 기프티콘으로 선물했다.
언제부터 J를 좋아했던 걸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생각해 보면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것 같다. 지난달. 그러니까 작년 12월, 연말이었다. 평소처럼 아침에 눈을 뜨고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하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예전과 달라 보였다. 곧 한 살 더 먹으면 마흔이라는 두려움 때문일까. 푸석푸석한 얼굴과 눈 밑 다크서클은 퀭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소년이라는 별명이 무색해 보였다. 애초에 소년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소년은 무슨. 아무 생각 없이 일하는 게 좋았다. 일에만 신경 쓰고 싶었던 건 순전히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주변의 일들에 얽매이기 싫었다.
일할 때면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아서 좋았다. 성과를 보이고 승진을 하며 남들보다 앞서고 싶었다. 그게 옳은 길이라 생각했고, 그 길을 잘 뛰어왔다. 다가오는 봄 정기인사 때 차장 진급 대상자에 들 것이라며 인사팀 P과장이 귀띔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다른 생각이 든 것이다. ‘승진하면 뭐 해?’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것일까?’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자책과 고민은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풍선처럼 부풀었다.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싶어졌다. 그게 무엇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나른해지는 어느 날 오후 옥상에 올라가 J와 커피를 마시며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 있었다. 늘 J의 고민을 들어줬지, 내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J에게 얼굴이 예전 같지 않고 늙는 것 같다는 속상함을 말했을 때, ‘누가 과장님을 내일모레 마흔 살로 보느냐?’며 너스레 떨던 J는 뜬금없이 자신의 꿈을 늘어놓았다. 좋은 생각을 하면 젊어질 것이라면서.
동해의 한적한 해변 이왕이면 강원도 고성에 게스트하우스를 열어 사람들을 만나며 이야기 나누고, 파도가 좋은 날이면 서핑을 즐기면서 살고 싶다는 꿈. 서핑으로 유명한 양양이 아닌 고성을 택한 이유는 양양은 이제 사람이 많아서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일이 우선인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특별하지도 대단해 보이지도 않아야 할 J의 꿈이 어쩐 일인지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J에게 감정이 생겨난 것이 말이다. 밝은 모습, 소소한 행복, 애틋한 눈빛,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 둥글둥글한 성격. J가 가진 모습들은 어느덧 내게 허황이 아닌 이상으로 다가왔다.
*
“과장님도 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불러도 모르고.”
“어, 아무것도. 생각할 게 있어서.”
J가 내게 웃어 보인다. 좋아하는 사람이 보내오는 웃음에 기분 나쁠 사람이 있을까. 고마운 일이고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웃음을 마냥 좋아하기 위해서는 아픔도 감내해야 한다. 고속버스는 횡성휴게소에 도착해 출입문을 열었다.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가자는 J를 따라나섰다. 내가 뭘 먹겠느냐고 물었지만, J는 괜찮다며 기지개를 켠다.
영하의 날씨에 입김을 낼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캔커피 자판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일부러 커피를 하나만 뽑았다. 난 아무래도 괜찮고 너만 좋으면 된다는 메시지. 조금 촌스럽나 싶지만 그만큼 내가 널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냥 손에 쥐고 있으라며 따뜻한 캔커피를 건넸다. 고맙다는 말. 역시 과장님뿐이라는 말. 지나가는 인사치레지만 사소한 한 마디에 의미를 부여한다.
더 잘해주고 싶다. 무엇이라도 주고 싶다. 다시 버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출발하고 승객들은 다시 자신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휴게소 도착을 모르는지 계속 잠들어 있는 사람, 이어폰을 끼고 창밖만 응시하는 사람, 고개를 숙이고 휴대전화에 빠져든 사람. 강릉에서 이곳 휴게소까지 약 한 시간, 생각만 하다가 시간을 보낸 게 못내 아쉬웠다.
J에게 말을 건넸다. 남자친구와는 잘 지내고 있느냐고. 수많은 질문 중에 왜 남자친구 소식이 궁금했을까. 다른 이야기도 많았을 텐데. 후회가 들었지만, J는 남자친구와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말이 별로 없다는 J의 남자친구는 J보다 훨씬 어리다.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 그의 프로필에는 관심이 없었다. J의 이야기를 끊었다.
“내가 널 좋아하잖아.”
순간 모든 게 멈췄다. 귓가를 맴도는 문장도, 흔들리는 눈동자도,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마저도 정지. 급하게 대답을 준비하는 J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말을 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듯 평소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웃어 보인다.
“아유, 과장님~ 사람들이 다들 저를 좋아해요. 아시잖아요, 제가 인기가 많아요. 하하.”
“그건 그렇지.”
J가 부담스럽지 않도록 나 역시 살짝 웃어 보였다.
그것도 잠시, 다시 나의 말들이 쏟아졌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다. 좋아한다는 말이 결국 입 밖으로 나오자, 그 후에는 나도 내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아무나 좋아하지 않는다’ ‘뭘 바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내 감정이 그렇다’ ‘네가 있어, 위로가 된다’ ‘생각이 맞는 사람을 만난 게 처음인 것 같다’ ‘네가 정말 좋다’
참 빤한 이야기들이다. 알면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니까.
J에게는 이미 다른 누군가에게 많이 들어 익숙한 문장일지 모른다.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싫었다. 적어도 J에게는 말이다. 처음 몇 번 대꾸하던 J는 이내 포기한 듯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다. 진지한 표정이면서도 한 번씩 살짝 웃으며 내 말을 듣고 있다는 정도의 딱 그만큼.
좋아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감정은 논리로 해석될 수 없으니까.
짝사랑처럼 힘든 일이 또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백뿐이다. 더는 욕심을 내면 안 된다. 사람 마음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그렇게 잘 참고 꾹 버티었으면서, 지금은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다.
환상은 결코 현실에 도움 되지 않는다. 감정은 내게 왔고, 흰 눈처럼 차곡차곡 쌓였다. 숨기어야 했고, 무너뜨려야 했다. 이렇게 두면 안 되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아픔이나 상처가 두렵지는 않다. 그런 것이 걱정스러울 나이도 아닐뿐더러, 상처가 싫다고 감정을 버릴 수 없다. 다만 이룰 수 없는 현실, 꿈같은 이상으로 끝날 것이라는 생각이 슬펐다.
고백의 진실함을 잃은 것 같다.
“나와 같은 감정이 아니라도 괜찮아.”
“요즘 무슨 일 있으세요?”
“이미 알고 있잖아. 다른 말하지 않아도 돼. 그냥 내 감정이 그래. 솔직한 감정 표현은 상대에게 때로 이기적이지. 그래서 미안해. 너를 너무 좋아하게 됐어.”
J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미안함 때문이 아니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J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무 말이 없는 J의 모습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강하게 부정하거나 불쾌함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는 나와의 관계에 대한 배려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부정하지 않는 상황은 감사한 일이다.
상대가 누구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며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J였다. J에게 선택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아무런 바탕 없이 덜컥 고백부터 한 내가 성급했는지 모른다. 세상 모든 일은 순서가 있기 마련이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제로일 뿐이다.
*
강릉에서 출발해 이곳 휴게소에 오는 내내 이어폰을 귀에 꽂고 창밖을 바라보던 J는 좌석 아래를 내려 보다가 내 얼굴 보기를 반복한다. 아직 스마트폰 음악 앱을 끄지 않아서인지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이어폰 너머로 희미하게 멜로디가 들렸다.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노래가 나의 테마곡이 되었으면 했다. 설렘 가득한 사랑 노래가 아닌 슬픈 이별 노래라고 할지라도.
부담스럽지 않으려고 웃으며 고백하는 내 모습이 가벼워 보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싫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버스에서 고백이라니.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 극도로 창피해지는 상황이 와도 어찌할 수 없다. 시내버스라면 기사님에게 차 좀 세워 달라고 말이라도 하지. 여긴 영동고속도로 한복판이다.
“과장님 장난치지 마세요.”
“이제까지 내 모습 지켜봐 왔잖아.”
“예전에는 이런 말 안 하셨잖아요.”
“내 마음이 달라졌어. 나도 모르게...”
웃음기 빠진 말에 J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 할까 보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 같다. 밀어내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어쩌면 애매하고 어정쩡한 자세가 나를 더욱 끌어당겼다. 적극적으로 더 들어가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조심스러웠다. 차근차근 쌓아온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J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것일까. 아니면 예상했던 것일까. 처음의 당황스러움은 더는 보이지 않는다. 생각을 골똘히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듣고만 있다. 둘 사이의 적막함이 어색함으로 이어질까 두려워,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런 말 저런 말. 내 이야기를 듣고는 있는 걸까. 쓸데없는 농담도 이었다. J가 피식 웃는다. 그래도 내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있는 J가 고마웠다.
내 생각, 내 마음, 내 꿈을 J 앞에서 펼쳐 놓았다. 밝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달콤한 사랑을 하고 싶다. 매일 보고 싶고 항상 생각나는 사람이면 좋겠다. 함께 여행을 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추억을 남기고 아쉬워하며 다시 보고 싶은 사랑을 만나고 싶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다.
고백이라기보다는 내가 이루고 싶은 소망들이었다. 그런 사람을 만나 그런 사랑을 하고 또 사랑받고 싶다고 했다.
“좋네요.”
버스는 어느덧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고 있다. 이제 터미널까지도 얼만 남지 않았다. 예상 도착 시각보다 더 빨리 왔다. 늘 그런 식이다. 모든 일이 생각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처럼 내일도 J를 보게 될 것이다.
어떻게 얼굴을 봐야할지 걱정이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반갑게 인사하고 함께 점심 먹고 커피 마시며 야근까지 할 것이다.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J를 매일 볼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내 고백에 J는 좋다 싫다 말이 없다. 좋을 수도 또 싫을 수도 없는 일방적 감정 전달이었으니까. ‘미안하다’ ‘죄송하다’ ‘이러시면 안 된다’ 적어도 이런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은 나를 배려해서였는지 모르지만, 다행이다.
“우리 친한 사이지?”
J에게 묻고 싶었다. 내가 얼마만큼 가까이에 있는지. 그리고 에둘러 이렇게라도 알려주고 싶었다. 멀지 않은 곳에 내가 있다는 것을.
“그럼요. 우리 정말 친한 사이잖아요.”
우리. 단어 하나하나가 다 의미로 다가온다. 사소한 한 마디에 슬픔과 기쁨의 감정이 요동친다. 버스가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이렇게 말을 많이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과장님 배고파요. 고속터미널에서 교대까지 가깝죠? 우리, 곱창에 소주 한잔할래요?”
밥이 아닌 술, 괜한 의미부여. 정리가 되지 않기는 J도 마찬가지 아닐까. 다시 밝은 얼굴로 돌아온 J는 신이 난 듯 말을 건넨다. 서울에 다시 돌아온 게 좋아서일까. 꼼짝할 수 없었던 버스를 내려서일까. 아니면 좋아한다는 고백에 기분이 좋아진 것일까. 알 수 없는 J의 표정이다.
*
곱창으로 유명하다는 식당은 평일임에도 사람들로 가득하다. 안쪽에 자리가 있다며 들어오라는 아주머니가 부리나케 먼저 들어가 빈자리 테이블을 행주로 대충 닦는다. 모둠을 주문하고 외투를 벗어 커다란 비닐 안에 넣었다.
옆모습을 바라봐야 했던 버스 안에서와 달리 J를 마주 보자 괜스레 긴장된다. 차마 얼굴을 바라보기 어려워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왜 다른 곳을 보며 이야기하느냐는 J의 말에 네 얼굴을 보기 부끄러워서라고 했다. 소년 같다고 웃으며 놀린다. 얼굴이 살짝 뜨거워진다. 초벌 된 곱창이 불판 위에서 익어간다.
소주를 잔에 따르고 서로의 술잔을 들어 부딪힌다. 습관은 참 무섭다. J에게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해진다. 좋다, 싫다 같은 명확한 단어는 아닐 것이다. 둥글둥글한 성격은 모서리로 이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J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예상되는 답이 떠올랐지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예상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그런데 내게는 그런 사람이 없었어.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기엔 삶이 너무 우울해. 그때 네가 내게 왔어.”
술이 들어가니 말도 술술 나오나 보다. 부끄러움도 거리낌도 없다. 이쯤 되면 눈치 볼 것도 없다. 절박한 사람은 주변에 눈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저 앞만 보고 달릴 뿐이다.
“알고 있었어요. 저 좋아하는 것. 그렇게 티 나게 행동하시는데 어떻게 몰라요.”
J는 비어 있는 내 잔에 소주를 채우며 말을 이었다.
“늘 옆에서 챙겨 주셔서 고마워요. 알게 모르게, 아무 말 없이 챙겨 주셨잖아요. 이야기 꺼내기 어려웠을 텐데 용기 내주셔서 감사해요.”
알고 있었다고. 난 내색한 적 없는데. 알고 있었으면서 아까 고속버스에서 왜 한 마디 없었던 것일까. 싫다는 이야기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것일까. 정중한 거절을 할 때는 서두가 길기 마련이다. 좋음에는 이유가 필요 없지만 싫음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필요하니까. 이쯤에서 말을 끊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 정도면 됐다고. 알아들었다고. 그런데 나는 J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다.
“제게는 남자친구도 있고... 저도 과장님을 좋아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배울 점 많은 직장 선배로서 좋아하는 것은 분명해요.”
역시나. 아니라는 것. 그래도 예의를 다해 이야기하는 J가 고마웠다. J에게 웃어 보이며 괜찮다는 말을 꺼내려는데 J가 다시 말을 잇는다.
“너무 갑작스러워요. 좋다, 싫다 너무 극단적으로 가는 것도 싫어요. 제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고.”
좋아한다는 고백은 나의 자유이지만, 감정을 받아들이는 건 J의 선택이다. 난 감정을 고백했을 뿐이고 J는 선택하지 않은 것뿐이다. 적어도 고백을 받아둔 건 분명하다.
“다음 달은 어느 지점으로 출장 가세요?”
“제주도.”
*
스마트폰 전화벨이 울린다. 액정 화면에 J의 이름이 보인다. 어쩐 일이지. 연락할 일이 없을 텐데. 곱창집에서 술 마시던 때가 생각났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달라진 건 없었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며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J와 마주하지만, 사실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시간은 참 빠르다.
“과장님 어디세요?”
“어디긴, 제주도 출장 왔잖아. 어제 출장 자료 만드는 것까지 도와주고선.”
J는 여전히 친절했다. 처음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렇네요. 저 지금 제주도 가요. 이제 막 비행기 타려고요.”
“갑자기 제주는 왜?”
“주말에 할 것도 없고, 과장님 보려고요.”
휴대전화 너머로 J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J는 한 시간 정도 뒤에 제주공항으로 데리러 오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는다. 출장 업무가 금요일 오후로 잡히면서 이왕 이렇게 된 것 일요일까지 제주에서 혼자 있을 생각이었다.
J가 여기로 온다는 말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당황스럽다. 예상했던 상황이 아니니까. 조용히 혼자 쉬려 했던 주말, 내게 찾아온 뜻밖의 손님. 싫지만은 않다. 일찌감치 제주공항에 도착해 주차하고 입국장 근처에 선다. 출입문으로 나오는 사람 한 명 한 명을 바라본다. 멀리 J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내게 온다.
“내가 무슨 관광 가이드냐?”
“가이드 맞아요, 저의 주말 가이드라고 할까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생글생글 웃는 표정이 수학여행 온 소녀 같다.
“그래서 이제 뭐 어떻게 하려고?”
“어떡하긴요, 과장님이랑 같이 다닐 건데.”
“나 아무런 계획이 없어. 그냥 쉴 생각이야. 책 읽고 커피 마시고 바다 보고.”
정말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아무것 하지 않고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저도요. 책 읽고 커피 마시고 바다 보고, 같이.”
내 말투를 따라 하는 J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같이’라는 말을 반 박자 쉬고 내뱉은 탓인지, 중요하게 들렸다.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려 괜스레 말을 돌렸다.
“밥은? 점심 먹었어?”
“배고파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J의 가방을 건네받아 들고 주차장으로 향하며 선글라스를 썼다. 제주에 놀러 온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일은 끝났고, 지금부터는 내 시간이다. 우리의 시간이다. 공항 문을 나서자 햇살이 내려온다. 서울은 아직 영하의 기온이었는데 제주의 2월 중순은 벌써 봄 같다. 봄처럼 따뜻한 날씨에 그간 얼었던 마음이 녹는 듯하다. 나는 따뜻한 게 좋다. 밝은 게 좋다.
“제주에 온 거 남자친구가 알아?”
“에이, 남친이랑 헤어진 지가 언젠데. 아직 모르셨어요? 우리 빨리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