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프란볼루, 이 곳에선 쉬어가세요
터키 여행을 떠나며 알게 된 당연하지만 새로운 사실은 터키는 정말 정말 정말 크다는 것이었다. 일단 터키 여행의 시작이 되는 이스탄불로 들어가서 10시간 내외로 버스를 타고 도시를 이동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어떤 도시를 가더라도 장거리 버스가 출발하는 정류장은 늘 표를 사는 사람들과 도시를 들고 나는 배낭여행객들이 북적였다. 우리가 1주일 정도 휴가를 내고 터기에 간다 해도 찍고 찍고의 패키지가 아니면 3개 정도의 도시를 보기도 빡빡했다.
샤프란볼루는 빅사이즈 땅 덩어리 터기에서 넣기보다 빼기 딱 좋은 도시였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작고 소박한 마을. 이름은 뭔가 섬유 유연제 향기가 날 것 같고 꽃같이 예쁘지만 하루 아니 반나절에도 다 볼 수 있다는 시골 느낌의 마을이었다. 열풍선의 천국 괴레메부터 에메랄드 빛의 파묵칼레 온천까지 기이하고 희귀한 볼거리가 넘치는 터키였다. 나도 여느 여행자였다면 이 도시를 뺐을 것이다. 하지만 나보다 먼저 터키로 여행을 다녀온 친구 영은이는 샤프란볼루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말했고, 나라면 분명 이 마을을 좋아할 거라고 말했다. 공감의 공동체인 그녀의 말은 틀릴 리가 없다. 나는 의심 없이 그녀가 묵었던 숙소를 그대로 예약했다.
이스탄불에서 심야 버스를 타고 6시간을 달려 새벽에 터미널에 내렸다. 차도 사람도 없는 터미널에서 노숙을 하기 직전에 이르면 영어가 1도 안 통하는 터미널 관리인 아저씨가 손짓 발짓으로 숙소에 픽업 호출해주시고, 숙소 아저씨가 아침 6시에 오실 때까지 우릴 아저씨 사무실 안에 보관(정말 보관이란 단어가 딱이다...)해주신다. 동이 틀 때까지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 아저씨는 킁킁 콧소리로 뭐라 뭐라 하시고, 우리는 응응하면서 종이에 쓰고 보여주며 새벽이 지나간다. 동이 틀 때 즈음 80년대식 혹은 그보다 더 오래돼 보이는 포니를 타고 세상 인자해 보이는 숙소 할아버지가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 그렇게 우리는 오스만튀르크 시대에 지어진 전통 가옥으로 들어갔다.
지은 지 정말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집이다. 밖에서 보면 뭔가 성냥갑 같은 생각도 들고 나무 계단을 오를 때마다 창문을 열 때마다 나무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밤엔 창문으로 주황빛 가로등 불빛이 비치는데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사각사각 종이 일기를 쓰고, 한쪽으로 긴 머리를 빗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창문 밖에선 누군가 돌을 던질 것 같기도 했고 뭔가 시간이 잠시 멈추었거나 세상의 시계와 다르게 천천히 흐르는 공간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숙소를 벗어나 마을 속으로 들어서니 머리 위 온통 포도덩굴로 덮인 시장이 등장한다. 그간 어떤 나라에서도 보지 못한 햇살과 포도덩굴이 어우러진 시장이었다. 덩굴 사이로 녹아든 빛은 바닥 돌, 창문, 나무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노래 가사 중에 '햇살이 녹은 거리를 선물해주고 싶은 맘'이라는 가사가 떠올랐다. 이런 게 햇살이 녹은 거리가 아닐까 싶었다. 덩굴 밑 그늘에서 히잡을 얼굴에 두른 여인들이 뜨개질을 하고 꽃무늬가 자수 놓인 흰 천들은 주렁주렁 매달려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골목 귀퉁이에서는 기타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는 노래를 불렀다. 대체 이 마을은 어떤 곳일까? 세상 어딘가엔 이토록 싱그럽고 맑은 기운의 시장이 숨어 있을 거라곤 보기 전에 상상할 수 없었다.
시장을 걷다 만난 노천카페를 보고 친구에게 외쳤다. "내가 본 카페 중에 젤 아름다운 것 같아" 그것도 몇 번이나 흥분해서 말했다. 하염없이 하늘 덩굴과 나무와 화덕 속 커피를 바라봤다. 끓어오르는 커피처럼 기분이 좋아져서 내 친구와, 숙소에서 만난 또 다른 여행자 일행에게 커피를 샀다. 이 카페가 아름다워 내가 커피를 사고 싶다고 그녀들에게 말했다.
포도나무 가지에 금색 커피 잔(제베즈)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주인 언니는 장갑을 끼고 장인 정신으로 오랜 시간 숯불을 피워 터키시 커피를 만들고 있다. 깨끗하게 닦은 잔들은 나무에 걸어 말린다. 야외 테이블은 흰 천이 깔려있고 나뭇잎을 통과한 빛들이 물방울무늬를 영롱하게 드리운다.
커피콩을 볶고 갈아서 제즈베라는 주전자에 담아 숯불 위에서 끓여낸다. 숯불의 세기나, 커피의 양, 끓이는 시간 등 많은 변수들이 있어서 맛이 조금씩 다르다고 했다. 우리가 마시는 물 같은 아메리카노랑 달리 색부터 진하며 묵직한 맛이 따라온다. 마신 뒤 바닥엔 침잠된 커피 가루를 바라본다. 처음 이스탄불에서 작은 잔에 담겨 온 걸쭉한 터키 커피를 벌컥 마시고 입에 들어온 커피 가루에 1차 놀람, 한약을 마시는 기분에 2차 충격이 있었다. 하지만 이 곳에서 안내해준 방법대로 마시니 커피 맛 또한 터키 여행 중 마신 중 내게 제일 잘 맞았다. 1) 물로 목과 입을 깨끗하게 한다 2) 진한 터키 커피를 마신다. 3) 달콤한 베리 시럽을 홀짝 한다.
이 마을 한 복판 버스정류장 앞 중심이 되는 건물은 목욕탕(하맘)이었다. 돔 모양으로 생긴 건물인데 처음엔 목욕탕이라고 생각을 못하고, 관공서나 종교 건물인 줄 알았다. 17세기에 지어진 터키 목욕탕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 거의 없다는데 샤프란볼루에 존재했다.
평소 한국에서도 대중목욕탕에 거의 가지 않던 나는 목욕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올랐다. 여행 중 장거리 버스 이동으로 지친 몸도 풀고 싶었고, 무엇보다 목욕탕 내부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 마을에서 목욕이라니 모든 게 느슨해지는 샤프란볼루에서 이보다 완벽한 저녁 할 일은 없을 같았다. 해가 질 무렵 목욕탕 연기가 피어오르고 난 친구를 조르고 졸라 목욕탕으로 입성했다! 우리는 열쇠를 받아 각자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벗고 세면도구를 챙겨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탕으로 진입했다. 우리나라 목욕탕과 가장 다른 것은 물이 없다는 것이었다. 냉탕 온탕 대신 제단 같은 대리석이 좌악 펼쳐져있었다. 당시만 해도 동양인은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고 현지인과 몇 명의 서양인이 대리석 위에 누워있고 앉아서 물을 부어가며 몸을 씻고 있었다. 처음 보는 목욕탕 풍경에 당황하고 뻘쭘하여 둘이 서로 어색하게 바라보며 웃던 기억이 난다.
우린 뜨근한 대리석에서 몸을 불리고 때밀이 아주머니에게 시원하게 때까지 밀었다. 터키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는 상상도 못했다. 터키 샤프란볼루에 가서 목욕탕에 가고 때까지 밀게 될 거란 것을... 아주머니는 정말 한국 목욕탕처럼 팔 하나를 들고 쓱쓱 밀기 시작하시더니 내 몸에 물을 마구 끼얹어 가며 구석구석 다 밀어주셨다. 이후 거품을 내서 몸을 닦아 주시고 샤워 후 마무리. 목욕을 하고 밖으로 나왔더니 해가 지고 밤이 되어 있었다. 공기는 시원했고 몸은 나비가 된 듯 가벼웠다. 양손으로 볼을 만지니 뽀뜩뽀득 소리가 날 것 같이 촉촉했다. 빙그레 바나나 우유를 하나 사서 물고 싶었지만 대신 터키 식당에 가서 시원한 쥬스를 마셨다. 여행은 대부분 100% 장전된 체력을 소진하는 과정이었는데 이곳은 역으로 지친 몸을 충전하는 느낌이었다. 오늘 밤은 그 어떤 날보다 깊은 꿀잠을 잘 것 같은 확신이 뽀송한 몸을 타고 흘렀다.
카페와 목욕탕이 가장 인상적이었지만 이 외에도 작은 여행의 기억들은 포도덩굴처럼 주렁주렁 딸려 올라온다. 새벽부터 주린 배로 찾아간 노천 식당에서 먹던 터키식 아침과 꽃무늬 식탁보가 생각난다. 럭비공처럼 빵이 튀어 나오던 빵집과, 우리가 사진을 찍으면 그 속으로 얼굴을 내밀던 순수한 동네 아이들도 생각난다. 맥주를 사서 노을을 보러 언덕에 올라갔더니 기도 시간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붉디붉은 노을이 물들던 풍경이 생각난다. 장난감 같은 집엔 불이 켜지고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던 풍경에 묘한 위로를 받았던 기억도 떠오른다.
이후 터키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 사고들을 뉴스로 전해 들었고 내 기억에서도 터키는 아련한 과거 여행지로 자리잡았다. 여행 후 누군가를 만나면 볼거리 가득한 신기한 세상 터키 여행을 종종 추천하곤 했다. 하지만 만약 내가 빅사이즈 터키에서 단 한 곳만 갈 수 있다면 난 반드시 '샤프란볼루'에 갈 것이다. 새벽에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숙소에서 만난 한 여행자의 말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전 여기에 한 번 오고, 여기만 와요. 지금도 다른 나라에서 넘어오는 길이에요"
2012년 9월 13일의 일기
힐링시티 '샤프란볼루' 햇살과 쉬어갈 포도덩굴 그늘을 주고, 조용함과 새소리를 주고, 착한 사람들과 그들의 미소를 주고, 활기찬 시장과 그 속의 여유를 주고, 환상적인 노을을 볼 수 있는 언덕을 준다. 도시로 떠나는 아들 내외를 안고 눈물을 흘리는 시장 할아버지를 본다. 이 도시의 마지막 밤은 한국에서도 잘 안 가는 목욕탕 = 하맘 방문, 모경이를 조르고 졸라 목욕탕에 가서 뽀득뽀득 씻고 갑니다.
(똑같은 숙소와 목욕탕 사진은 잃어버린 친구를 찾은 듯 반갑다 :)
아래 사진을 통해 포도덩굴 카페의 겨울 모습도 볼 수 있다. 같은 장소, 색다른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