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에 갔다 오면 걸린다는 연예인병(?)
혹시 중남미 여행을 다녀오면 연예인병에 걸린다는 농담, 들어보셨을지 모르겠다. 여행 경험이 있는 사람들과 가끔 우스개로 하곤 했던 이야기다.
이들의 천성이 워낙 사람을 좋아하기도 하고, 또 낯선 동양인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나도 여행하는 동안 혼자 다니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일이 적지 않았는데 가끔은 불편하기도, 가끔은 재밌기도 했다. 그중 좋았던 것만 떠올려 보며, 자, 이제부터 왜 연예인병에 걸릴 수밖에 없었는지 해명(?)을 해 보겠다. (동의하지 않으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순전히 제 경험을 기준으로 써 보겠습니다!)
¡Hola!
멕시코는 친구를 만들기에 가장 좋은 나라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말을 걸고 싶거나 친해지고 싶으면 바로 실행으로 옮긴다. 마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전학생처럼, 주변에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이들은 사람 사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 남자아이와 투샷을 찍어 줬는데 주변에서 꺄르르 웃고 난리가 났다. 사실 나이 차이가 꽤 났기 때문에 내가 보기엔 다들 귀엽기만 했다.
친해지고 나서는 Me agradas, Te quiero, Me caes bien 등(='너를 좋아해' '넌 나랑 잘 맞아'), 예쁜 말들로 마음을 많이 전해 주었다. 특히 Serdán의 학교에 있는 동안 수많은 새로운 친구들과 전에 없던 설렘 가득한 날들을 보내며, 상상하지 못했던 환대가 매일 즐거운 행진처럼 이어졌다.
같이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여행을 하는 동안은 거의 혼자 다녔는데 길에서도, 박물관에서도, 같이 사진 찍어달라는 사람을 꽤 많이 만났다. 마을에 머무르는 동안은 학교에도 갔고 봉사활동도 해서 그런 거라 생각했는데, 여행자 모드일 때도 이런 일이 왕왕 일어났다. 그들은 대부분 내가 무방비로 있을 때 부탁했으므로, 나의 흑역사를 그대로 담아갔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그들의 심리가 신기했지만 어리둥절하면서도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어서..
심지어 혼자 다니면서 셀카를 찍을 때 이렇게 갑자기 끼어들기도 했다. 뚜벅이 여행자에게 웃음을 선사해 준 유쾌 발랄한 멕시코인들!
여행 중 만난 한국인 중에 '한복'을 준비해서 온 동생이 있었다. 이 친구는 유적지에 갔을 때 같이 사진 찍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거의 '스타'였다고 했다. 나도 여행 가기 전 한복을 가져갈까 잠시 고민도 해 봤지만 귀찮고 짐만 될 것 같아서 생각만으로 그쳤는데.. 언젠가 게으름을 이겨내고 개량 한복을 가져가서 멕시코의 스타가 되어 볼까?
한마음이 된 버스 승객들
계속해서 등장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여행 중 자주 길을 잃었다.(길치의 비애..) 누군가 길을 알려줘도 중간에 엉뚱한 방향으로 빠지기 부지기수였다. 이날도 버스를 잘 못 타서, 내려서 다른 버스로 환승을 했다. 정류장에 있던 현지인에게 물어 버스에 탔고, 불안한 마음에 버스 안에서도 한번 더 길을 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헷갈려 하자 옆에서 한두 명씩 사람들이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방향을 잘못 든 곳의 교통편이 애매해서 그랬던 것 같다. 버스 안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아는 더 좋은 길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고마울 따름이었다.
결국 목적지 근처에 내렸는데, 내가 또 엉뚱한 방향으로 길을 잡고 있었나 보다.(히유) 그때 사람들이 버스 창문을 열고 외쳤다. "저쪽으로 가야 해! 저쪽!!" 길에서 바라보니 버스 창문마다 하나같이 내게 방향을 알려주려고 손짓발짓을 하며 애쓰고 있었다.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나의 길을 찾아주기 위해 모두 한 마음이 된 승객들. 덕분에 나는 맞는 방향을 찾아갔고, 버스가 멀어지는 동안 있는 힘껏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모두가 정겹게 인사를 해 주었다. 이 명장면을 나 혼자 봤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연예인의 기분을 맛본 시간
멕시코의 태권도 교실에서 한국어 단어들을 가르쳐 준 날이었다. (관련 글 : https://brunch.co.kr/@julyrain/27 )
태권도 수업이 끝나고 나서 다 같이 사진을 찍었다. 아마도 이날은 내 인생 최대로 인기를 누린 날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내가 찍은 재미있는 사진들이 훨씬 많은데, 아쉽게도 폰이 깨져서 잃어버리는 바람에 친구들에게 다른 사진들을 받았다. 이들은 태권도 교실에 방문한 한국인을 정말 반갑게 대해주었다. 교실에는 3~40명 정도 있었는데 끝나고 약 30분 동안 사진 요청이 끝없이 쇄도했고, 진짜 정신없이 기념샷을 찍었다. 한 무리와 찍어주고 나면 또 각각 나와 개인 샷을 원했고, 심지어 계속 대기반이 줄을 서 있었다. 갑자기 수줍어하며 목걸이를 선물로 준 고마운 아이도 있었다. 한동안 페이스북에 막 올라오는 굴욕 사진과 동영상들을 차단하느라 혼났지만..ㅎㅎ 진정 연예인의 기분을 맛본 시간이었다.
TV에 출연하다
이 마을에 있는 동안 교내의 영상 인터뷰, 라디오 인터뷰를 해 주었는데 그게 일이 더 커져서 지역 방송국에서 인터뷰까지 했다! 아마 이곳이 작은 마을이라 가능했던 일인 것 같다. 학교에서 인터뷰할 때는 정말 아무 말이나 했던 것 같다.. 예컨대 "멕시코 음식 좋아해요" ㅎㅎ
방송에서 어렵고 긴 이야기는 스페인에서 온 친구가 스페인어로 다 설명했고 나는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저는 Serdán을 사랑해요" 같은 진짜 외국인스러운 말만 (시키는 대로) 준비해서 했는데, 학교 친구들이 또 귀신같이 이 영상을 찾아서 보여줘서 "악! 제발 보지 마!!!" 하면서 폰을 뺏기도 했다. 돌이켜 보니 평생 다시 겪을 일 없는 재미있는 경험을 한 것 같다.
싸인 대신 한국어
한 축제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다가 한글을 보여줄 수 있냐고 해서 조금 써서 보여주었다. 몇 명에게 멕시코 이름을 한글로 써서 보여 주었다. 또 한 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싸인을 해 주듯 계속 한국어를 써 줬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너무 좋았다. 어떤 친구는 남자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국어 편지로 부탁했다. 간단하게 불러주는 대로 의역해서 써 줬는데, 그 친구가 너무너무 기뻐했다. 나도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특별한 선물을 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이렇게 작은 걸로도 행복해 하는 그들의 순수함이 예쁘다.
나는 평소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데, 여행에서 이렇게 주인공이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다녀와서 멕시코에서 공부를 한 적 있었던 지인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거기 갔다 오면 다 연예인병 걸려!" 라고 말해주어서 병명(?)을 알게 되었다는..ㅎㅎ
내 여행 역사 중 현지인들과 가장 많이 교감했던 곳, 멕시코. 그들이 내게 건넨 기분 좋은 인사들 덕분에 내 안에 긍정의 기운이 가득 퍼졌다. 머나먼 땅에서 사랑받은 기억들은 아직도 내게 힘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