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말, 추운 겨울. 회사를 다니며 처음으로 신용 대출을 받아 보증금 500만 원이 걸린 원룸에 입성했다.(그 500만 원 대출조차 얼마나 까다롭던지!) 독립한 지 7년 차만의 일이니 남들에 비하면 한참 느리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남의 집에 얹혀살고, 남의 짐과 섞여 살고, 부엌이며 화장실을 늘 공동으로 사용해야 했던 방들에 비해서는 바야흐로 지난한 보릿고개를 하나 넘은 것이었다. (짝짝짝)
보증금 500에 월세 45. 알 사람은 알겠지만 사실 신촌·홍대 일대에서 이 가격은 최저가에 가깝다. 그런고로 어떤 성취감과는 별개로, 생활의 질은 크게 개선되지 못했다. 일반적인 아파트에서 현관과 신발 곁에 앉아 밥을 먹는다거나 화장실 바로 앞에 이불을 깔아 놓는다고 생각하면 엄마한테 꿀밤 한 대 얻어맞기 딱 좋은 행동 같을 테지만, 스위치를 똑딱 눌러 불을 밝히면 숨을 곳 하나 찾을 수 없는 단칸방에서는 이 모든 게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크리에이터였던 나는, 창의성을 십분 발휘해 그 방의 좋은 점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초록색 벽지였다. 특별히 초록색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차분히 톤 다운된 '인디 그린'과 있는 듯 없는 듯 크런치한 표면의 질감이 퍽 마음에 들었다. 몇 번 다녀간 친구들도 이 시기를 자연스럽게 '아, 그 초록색 방에 살던 때!'라고 부른다.
소확행이란 '단칸방에 사는 비정규직 개똥이'라는 이름표를 지우고 '리틀 아티스트 오브 그린 하우스'로 다시 쓰는뿌듯함 같은 것이 아닐까. 겨우 벽지 정도로 그들먹거릴 수 있었던 나의 청춘은 호기롭다 못해 찬란하다.
#6-2. 1층의 불편함
그러나 1층에 살아 보니 또 이런저런 불편함이 생겼다. 그 방은 창문을 열면 지나가는 행인과 바로 눈 마주칠 수 있는, 방 중에서도 '최전방'이었다. 밖에서 내 방이 다 보였다. 일부러 관찰하지 않아도 여자 혼자 사는 방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대로에서 열 걸음 정도 들어온 길 초입이다 보니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았고 불투명한 창가에 남자 실루엣이 어른거릴 때면 어김없이 진한 담배 냄새가 스며들어왔다. 부엌 쪽에 있는 와플 구멍만 한 창문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샛길로 향해 있어서 그나마 시선에서 자유로웠지만, 분명 손댄 적이 없는데 열려 있는 걸 발견한 이후로는 강박증처럼 상태를 체크하곤 했다.
뿐만 아니었다. 벌레는 또 얼마나 잘 들어오던지. 바닥에 모로 누운 채 이상한 예감에 눈을 뜨면 시야 앞에서 느릿느릿 기어가는 새끼 바퀴벌레라던지(소리 지를까? 말까?), 어느 날 들어와 보니 태연하게 떼 지어 지나가고 있던 개미들이라던지……. 틈. 틈. 틈. 그 틈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걸까. 나는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알 수 없는 틈. 알 수 없는 균열. 알 수 없는 허술함. 그 알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나는 늘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대관절 알 수 없는 그 틈으로, 혹시 내 무언가를 도둑맞으며 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루에 조금씩, 매일, 틈틈이. 어느 날 확인해 보니 텅 비어 있는 잔고처럼. (늘 비어 있었나?)
보지 마세욧! (그린 깔맞춤=더 이상함)
#6-3. 소모품
초록방에 살면서 두 군데 회사를 다녔다. 한 군데는 계약직, 한 군데는 프리랜서. 이 무렵 나는 더 이상 내 능력이 하찮아서, 사회초년생이어서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했던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턴, 프리랜서, 계약직, 계약직, 프리랜서. (흔히들 말하는 프리하지 않은 프리랜서 직원.) 스물넷부터 스물아홉까지 인턴 제외, 4번의 비정규직을 경험하며 뭔가 단추를 잘못 꿰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뉴미디어 업계에서 나는 젊고, 실험 가능하고, 저렴한 '가성비' 인력이었고 20대 후반만 되어도 슬슬 유행에 뒤처지는 취급을 받았다. 어깨가 처지는 퇴근길에는 어쩐지 점점 시들어 가는 마감 세일 양배추가 된 것 같았다.
비정규직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서로가 서로를 밟고 배척하며 정규직 결집체의 구심력이 되어 주었다.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도 그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부유했다. 회사는 여분의 부품을 충분히 구비해 둔 배부른 공장이었고, 공장장은 소모품이 닳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나는 그 과정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가 그토록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서로를 죽이라고 만들어 놓은 무대 위의 글래디에이터였단 것도 모른 채 서로에게 칼을 겨누었다.
이기주 작가님의 책 「글의 품격」에서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중세 시대 유럽의 영주는 어떤 단체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로운(free) 용병과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이 나면 용병은 긴 창(lancer)을 들고 나타나 영주 대신 싸웠다. 지금은 프리랜서가 자유 계약직 종사자를 일컫는 말이지만, 과거엔 '대신 피를 흘리며 싸우는 용병', '쓸 만한 창을 소유한 병사' 정도의 뜻으로 사용됐다.
어쩜, 용어마저 바뀌지 않았다. 천년이 넘게 지났는데이토록 구태의연할 수가 있다니. 비정규직들은 회사의 리스크를 대신 떠안고 피를 흘렸고, 쓸 만한 개인 장비까지 스펙의 일부로 내세워야 했다. 이후로도 나는 프리랜서, 계약직, 계약직, 계약직을 더 거쳤다. 나중에 가서는 '좋아해서' 이 일을 시작했다는 사실 같은 건 기억도 나지 않았고,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기억나지 않았고, 기억나지 않는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나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토해내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그 시뻘건 화염을 걷어내고 스스로를 정화하기까지, 나란 삐뚤어진 인간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 와서야 겨우 허튼소리를 픽픽거리며 지지리 궁상을 잘 떠는 30대가 된 것이다.
#6-4. 침낭
분노로 점철된 초록방의 말로는 결국 '자폭'이었다. 나는 모든 걸 내려놓고 남미로 떠났다.(오랫동안 독학한 스페인어를 써먹어보고 싶었기 때문.) 그렇게까지 멀리 떠나서 고작 한 일은 세상이 시키지 않아도 내가 이렇게 방랑하는 인간이라고, 내가 원래 그런 거라고, 세상에 맞서는 것이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런 데 힘을 빼서는 안 되는 건데, 그때는 그러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떠돌이를 자처하며 운명에 항변하는 일 자체가 사실은 정착에 대한 깊은 집착이고 변명이며 상처이자 희망이었던 것을.
초록방의 마지막 날들은 '침낭'이라는 물건으로 기억된다. 나는 근근이 모은 살림살이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고(성인 나셨다), 밤이면 달팽이처럼 침낭에 들어가 잠을 잤다. 내 몸을 폭 감싸주던 침낭 속은 그 어느 곳보다 아늑했다.(침대가 없어 늘 바닥에서 잤기 때문에,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포근했음.)
이것만 있으면 어쩌면 집 따위는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집을 꿈이나 사랑, 가족, 돈으로 치환해도 마찬가지였다. 돌돌 말아 접으면 도시락 가방 같이 작아지는 내 다정한 요술 침낭. 차라리 그 침낭 속의 따뜻한 밥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염없이 몽상했다.
그렇게 '밥이 되고 싶다'는 소박하고 불가능한 꿈을 새롭게 품은 채 나의 20대는 저물었고, 그렇게 틈 많고 탈 많던 그린 하우스를, 그렇게, 영영, 떠났다.
신촌의 겨울
신촌의 봄
신촌의 밤
신촌의 봄밤
아름다운 꽃밤
안산자락길, 봄, 2015
저무는 신촌 거리, 2015
지금은 사라진 연남동의 한 카페, 매번 바뀌는 인형 포즈를 열심히 기록
어맛. 봄이 왔네? (2015년의 나)
미련 많은 한 여인의 한때 추억이 가득한, 신촌의 기록. (사는 곳을 굉장히 열심히 기록하는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