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도 어쩌면 식물이었을까

열 번째 이야기(2019~2020)

by 세라

#10-1. 햇빛과 바람


나의 13번째 방은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곳을 통틀어 가장 깔끔한 신축 오피스텔이었다. 방 크기는 여전히 아주 작았지만 비밀번호를 누르고 건물에 들어갈 수 있는 집다운 집에 처음으로 입성한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당시 두 군데 회사에 합격했는데, 긴 고민 끝에 지방에 있는 한 회사와 계약을 했다. 나는 지방에 내려간 것을 집과 삶의 질로써 보상받고 싶었다. 보증금 1000에 월세가 50만 원인 그 오피스텔은 지방 치고는 비싼 편이었는데, 당시에는 지방의 시세를 잘 모르기도 했고 시간이 급해 부동산 딱 한 군데의 소개만 받고 쿨하게 결정을 내렸다. (물론 당한 거다.)


그 방은 아침이면 넓은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음습한 방에서 우울한 날들을 보내다 온 나에게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계시를 보는 듯 눈부신 경험이었다. 햇살이 쏟아지는 자리에서 아침마다 규칙적으로 잠이 깼다. 눈을 뜨면 파란 하늘이 보였다. 마치 식물이 된 것만 같았다. 어쩌면 세상에 처음 깨어난 사람 같았다. 가을밤 창문을 열면 소슬한 바람이 불었다. 얼굴이 달처럼 시원해졌다. 그동안의 내 삶에는 그저 햇빛과 바람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햇빛과 바람은 살균 작용을 톡톡히 해냈다.


나는 볕이 드는 자리에서 자주 우두커니 서 있거나 앉아 있었다. 순간순간에 자주 집중했으며 그러다 뜨끈한 감정에 목이 메기도 했다. 복잡한 대도시에서 다락만 한 방들만들 수밖에 없더라도, 세상 모든 사람 사는 방에 햇빛과 바람만은 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햇빛이 쏟아지는 오후, 어떤 사람이 자기 방 안에서 혼자 생의 의지를 다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영롱한 금빛 프리지아


#10-2. 층간 소음


평화로운 일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내가 살았던 방 중 가장 높고 가장 깨끗했던 그 방의 이웃에는 마음이 병든 인간이 하나 살고 있었다. 자세한 정보는 생략하겠다. 아직도 무섭고 불안하니까. 아무튼 그 이웃은 사는 내내 밤낮없이 우퍼 스피커를 틀어대며 자신의 정신병을 나에게 전염시켰다. 친구집이나 모텔방에서 자는 날들이 늘어났다. 대부분의 연차를 이 집을 피하는 데 썼다. 다크 써클이 짙어졌으며 극도로 예민해졌다. 온갖 집 관계자와 정부 기관과 경찰에까지 전화를 해 보았지만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층간소음에 대한 법이 굉장히 미비, 아니 전무하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지, 다른 사람의 불행에는 놀라울 정도로 무심하다는 것도.


나는 시끄러운 음악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지금까지도 친구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추천해주면, 나도 내가 요즘 자주 듣는 '나무 장작 타는 소리'나 '파도 소리' 링크를 보내준다.



#10-3. 한없이 가벼운 약속


7번째 회사는 1년이 지나고 나서 무조건 '정규직'을 시켜주겠다고 한 말을 아주 당연하게 모른 척했다. 반복된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 회사는 입사 전 내가 한번 거절했는데, 여러 번 전화가 와서 다시 한번 생각해 달라고, 와서 노하우를 많이 전수해 주셨으면 한다고 매달렸던 곳이었다. 절차상 바로 정규직을 시켜줄 수는 없지만 1년 뒤에는 무조건 시켜주겠다고 확언했다. 계약서에 명시해 달라고 요구하자 노동조합과 형평성 때문에 그럴 수가 없지만 "저희들은 99% 이상입니다! 서울깍쟁이들하고는 다릅니다!"라고, 이게 회사에서 온 공식 전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감정적으로 호소했다. 말들은 마치 바람피우는 연인의 "책임질게"라는 말처럼 한없이 가볍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제 웬만해서 듣기 좋은 말에 넘어가는 사회초년생이 아니었다. 특히나 이렇게 말이 앞서는 사람, 무거워야 할 말을 가볍게 내뱉는 사람은 본능적인 경계의 대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하는 동안 코로나가 창궐해서 회사가 어려워졌고, 팀장과 부장, 사장까지 바뀌는 정권 교체까지 일어났다. 그렇지만 1년 후 당연히 '계약 연장'을 하자는 회사의 태도를 마주했을 때는 그 사람을 찾아가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다. 당신, 말 그렇게 함부로 하지 말라고. 당신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은 하냐고. 당신이 뭔데 청년들의 희망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거냐고.


결론적으로 그러지는 않았다. 간신히 참았다. 더 큰 사고를 치지 않은 그때의 나를 칭찬한다. 나는 계약 연장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퇴사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이웃집 정신 병자를 피해 퇴실했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온 것까지, 하루 만에 일 년치 삶을 싹둑 잘라내 버리고도 그 시기의 마음을 다 달래지 못했다.



#10-4. 각성


길고 험난한 여정을 거친 뒤에야 나는 더 이상 '정규직'이라는 것에 진심으로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영원한 직업, 영원한 회사는 없으며 정규직이라고 해서 다 행복한 건 아니라는 것. 내가 해 온 일에 대해 회의하고 후회하고 부정하고 냉소하는 마음을 버리고, 모든 것이 내 선택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직 철새가 되어버린 경력을 이제 와서 어찌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게 주어진 기회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떳떳해지자는 것.


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가질 수 없는 것, 원래 가지지도 않았던 것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것. 그리고 앞으로는 그저 하루에 하나씩 기분 좋아지는 일을 하면서 살 것.


그 어느 때보다 식물을 많이 키우고 아끼고 의지했던 13번째 방/ 연화죽, 죽백, 개운죽, 아레카 야자
라넌큘러스, 유칼립투스, 그외 하양이 초록이
놀라울 만큼 오랫동안 시들지 않았던 카네이션
보름달처럼 빛나던 캄파눌라(초롱꽃)
환한 영감을 주던 안개꽃
마지막 순간까지 감동을 준 라넌큘러스
폼폼(국화)
하얀 레몬 같은 장미
아기 라넌큘러스
아이라이너 장미
분홍 장미
키 큰 루스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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