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의 은신처가 오늘부터는 전쟁터

퇴사 D-35

by 세라

퇴사를 통보받은 지 4일째. 대체로 덤덤한데, 때때로 기분이 왔다 갔다 한다. 내가 썼던 글을 다시 읽으며 살고 싶다, 살아남아야 한다, 괜찮아질 거야 싶다가도 죽고 싶다, 그만하고 싶다, 다 끝났으면 좋겠다 싶다. 이렇게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글이라는 것을 구원인 양 간절히 쓰고 싶다가도, 이 지구상에서 내 기록들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싶다. 어제까지의 은신처가 오늘부터는 전쟁터로 변해버린 순간. 한바탕 광광 속풀이를 한 뒤에야 시야에 들어온 책상 위의 찻잔은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변한 건 오직 네 마음뿐이라고 말해주는데…….


퇴사와 전세사기, 누군가에겐 어리석고 모자라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와중에도 타인을 의식하는 본능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내 글을 처음 봤는데도 선뜻 공감과 응원의 한 마디를 남겨주신 분들에게서 위로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겉으로는 별일 없는 하루였다. 회사에서는 하고 있던 업무들을 마무리하는 데만 집중했고, 남은 복지포인트를 어떻게 다 쓰고 나갈지 따위의 고민이나 했다. 집에 쌀이 얼마나 남았더라, 뭘 비축해 둬야 좋을까…… 퇴사한다고 해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일을 시키던 회사도 있었는데, 이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하지만 새벽 5시에 일어나 가장 일찍 출근해서 불을 켜는 일은 그만두었다. 보이지 않는 데서의 노력은 부질없다는 이 상투적인 사실은, 요 며칠 말로 뱉어지고 손에 쥐어지는 물성으로써 충분히 증명됐으니까. 계약 시기가 가장 빨랐던 내가 가장 먼저 잘리고, 동료들 또한 이중에 과연 누가 살아남을까를 공공연히 생각하고 있다. 이 오징어 게임에서 열외된 것에 안도해야 하나. 뜻하지 않게 나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홀연한 태도로 남은 날들을 보내는 동안 나는 분위기를 흐리는 마녀가 되려나. 사람들이 나를 너무 무겁게 대하는 것도 싫지만, 너무 가볍게 대하는 것도 싫다. 어쩌란 말이냐고 물으신다면…… 솔직히 나도 나를 모르겠다. 하나 웃긴 건, 이건 퇴사 경험 만렙의 나에게도 새로운 케이스인데, 팀장이 나를 아예 모른 척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게 결정되기까지 나에게 단 한번 말을 걸지도 않았고 이제 쳐다보지도 않는다. 지금껏 무능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무정하기까지 했구나. 참 별로다.


평소처럼 헤드폰을 끼고 한강을 지나쳐 달리는 퇴근길. 버스와 버스, 그리고 지하철…… 하루 2시간씩 대중교통에서 졸거나 치이는 일에서 이제 곧 벗어날 수 있겠구나. 문득 지하철 천장을 바라보니 깊은 한숨이 터져 나온다.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폰을 보고 있다. 나는 저들 중 누군가와 SNS에서 만났을까? 저녁이 되니 어쩔 수 없이 처연한 슬픔이 잦아드는데, 그럴수록 씩씩하게 밥을 먹었다. 오늘 저녁은 3분 카레. 1분에 잘 먹자, 2분에 먹어야 산다, 3분에 다 먹고살려고 하는 일이다카레 완성. 이건 지난번 전세사기를 극복하며 얻은 교훈.


퇴사를 통보받은 날 주말 약속을 다 취소했다. 이 기분으로 도저히 웃고 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또 헷갈린다, 이럴수록 사람을 만나야 하나? 타 부서 사람들이 지난번 일로 고맙다고 밥을 사겠다고 잡은 약속도 취소하고 싶다. 앞으로 더 많이 부탁하겠다는 의미가 더 큰 자리일 텐데, 그 사람들도 내가 곧 퇴사하는 걸 알면 시간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돌이켜보니 퇴사를 할 때마다 많은 것을 취소했던 것 같다. 여행을 취소하기도 하고, 몇 개월 치 결제해 뒀던 운동을 환불하기도 하고, 월셋방을 중도 퇴실해서 보증금을 까먹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계획은 하려야 할 수 없고 모든 선택은 현재를 우선으로 할 수밖에 없다. 결코 현재를 즐기기 때문에 내리는 선택이 아니다. 지금이 아니면 끝이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어쩔 수 없이 늘 전시 태세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미련스럽다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퇴사하고 또 퇴사하고도 다시 일어나 다음 회사를 향해 걸어갔던 과거의 내가 대단해 보인다. 그때 어떻게 했더라……?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처연함이 가시고 피로가 몰려든다. 모든 감정이 약간 희붐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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