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으로 가야 하나

퇴사 D-34,33

by 세라

D-34


금요일에는 하루종일 유령처럼 앉아 있다 퇴근했다. 이제 더 이상 불합리한 지시의미 없는 회의에 열내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불과 며칠 전까지 내 일상의 전부였던 것들이 오래전 기억의 일부 같다. 사람들도 일 얘기를 할 때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약간 허깨비가 된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종일 화장실에 들락거렸다. 언젠가부터 위염과 장염을 달고 산다. 술 약속을 취소했다. 오후의 한강을 지날 때마다 입안에서 짠맛이 느껴지는 기분이다. 갈증이 난다.


결국 또 다른 친구가 우리 동네까지 와서 술을 마셨다. 생각보다 풀 죽어 있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웃고 깔깔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친구가 퇴사하고 자유의 몸이 되는 게 부럽다고 했는데, 며칠 전처럼 그 말에 그렇게 짜증이 일지도 않았다. 나 사업해 볼까? 하며 나의 공상을 일부 말해주었더니 친구 왈: 그런 거 하는 애들은 보통 섬에 살던데?


섬으로 가야 하나…….



D-33


속이 좋지 않아서 요즘은 술만 마시면 다음날을 통째로 날려버린다. 토요일 오후 4시가 넘어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화장실에 들락거리느라 기운이 빠진다. 그런데 글은 왜 쓰고 있는 것일까…….


글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상처를 상처 아니라 하지 않고, 괜찮지 않은 걸 괜찮다 하지 않는다. 차마 터뜨리지 못한 오열은 오직 글쓰기를 통해서만 분출된다. 이 활자 하나하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내 감정들의 모양이다. 슬픔이 슬픔이라는 활자로써 겨우 얼굴을 드러낼 때 나는 조금 홀가분해진다. 이 많은 부유물 같은 문장들이 다 내 안에서 웅크리고 있었구나…… 그러나 내 글쓰기는 너무 미숙해서 자주 장황해진다. 모호하게 떠 다니는 수많은 감정들을 다 구해내지는 못한다. 어휘력이 부족한 탓일 게다. 삶과 글쓰기는 그렇게, 서로 합쳐질 듯 말 듯 각자의 막막함으로 순간순간을 살아내고 있다.


현실이 나에게만 잔인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요즘 튀르키예 지진 영상을 볼 때마다 너무 눈물이 나서 폰을 뒤집어 놓았다 다시 뒤집기를 반복했는데, 문득 지금 내 자아가 너무 비대해진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또다시 혼잣말을 글로 기록하는 지금, 내 머릿속은 온통 내 불행뿐이다. 고작 한 명의 인간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나의 우주는 얼마나 좁단 말인가.


나는 원래 내향적인 편이고 글 끼적이기를 좋아하는데, 공교롭게도 우리 팀 구성원들은 나 빼고 모두 외향적인 편이었다. 안타깝게도 조직 생활에서 내향성은 환영받지 못하고, 고쳐야 할 성격으로 여겨진다. 상사의 분기 면담에서 이 내향성을 지적받기도 했는데, 나는 그때 퍽이나 화가 났었다.


적게 일하고 많이 티 내는 사람 = 외향적

많이 일하고 적게 티 내는 사람 = 내향적


그들의 말대로라면 이렇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윗사람은 놀러 가고 없는데 자기 자리에서 일만 하는 사람은 내향적인 사람, 자주 웃고 잘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은 내향적인 사람, 묵묵히 자기가 맡은 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내향적인 사람. 별 거 아닌 것도 쉽게 부탁하는 사람은 외향적인 사람이고,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보고 마지막에 부탁하는 사람은 내향적인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반항심마저도 안으로만 향하여, 그들이 정의한 옳고그름에 단 한 번도 대들지 못했다. 단지 퇴근길에 한강을 보며 그 모든 것을 납득한 내 스스로에게 조용히 반기를 들었을 뿐이다.


어느 날 저녁, 사는 일에 온통 진절머리가 났다. 월급을 받아 전세 대출 이자를 내고 관리비를 내고 전기세를 내고 수도세를 내고 가스비를 내고 교통비를 내고 폰요금을 내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학자금 대출 이자를 내고 인터넷 요금을 내고 보험료를 내고 청약통장에 돈을 넣고, 비싼 점심, 비싼 커피, 원치 않는 웃음, 자기계발이라 믿는 사치…… 다들 도대체 어떻게 이걸 다 해내고 있는 거지?


너죽고나살자의 세계에서 나는 이제 막 낙오되었고 내향적인 것은 죄라는데, 나는,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결국 섬으로 가야 하나. 답도 없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