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세상이 망해도 나는 드립 커피를 내리고

퇴사 D-32

by 세라

아침에 눈을 떴지만 조금만 더 자게 해 달라는 몸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준다. 느지막이 일어나 빨래를 돌려놓고 어제 하고 남은 톳밥을 데워 먹고 드립 커피를 내린다. 책상 위에는 읽다 만 책이 펼쳐져 있고, 한편에 놓아둔 스피커로 부드러운 피아노 연주 음악을 띄운다. 낮의 내 공간은 언제나처럼 평화롭다. 퇴사일기 따위를 쓰지 않았다면,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 다 잊어버릴 정도다.


생각해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독서가 좋고 커피가 좋다. 퇴사며 금리며, 도대체가 환상 같다. 자, 세상의 구성원들을 재배열해 보자. 우선 회사의 크기를 장난감처럼 아주 아주 작게 줄이고, 그토록 그만 싫어하고 싶던 얼굴들의 농도를 낮추어 뒤편으로 보낸다. 지하 사무실의 답답한 공기는 여기에 없다. 어제의 눈물도 더 이상 없다. 오늘은 구름이 가득하고 햇살이 뭉근하지만 나는 분명한 낮의 기운을 느낀다. 책을 읽다가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졸음이 밀려와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눕는다. 아, 편안해…… 수면 위의 소금쟁이처럼 미동 없이 흘러가는 시간…… 어느새 봄날 연못에서 보았던 풍경이 내 안에 스며들고, 물속에서 잠자던 산수유 그림자들이 망울망울 흔들린다. 이제 나의 의식은 여기에 없다. 세상을 재배열하다 말고 나는 멀리멀리 가버렸다. 무의식의 문장들이 나를 따사로운 곳에 여행 보내 주었다. 감사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죽고 싶다고 써 놓고 다시 감사하다고 쓴다. 이렇게 써 놓고 다음 순간 망했다고 쓸지도 모르지만…… 그저 그렇게 받아 쓸 뿐이다. 쓰는 것밖에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내일 세상이 망해도 나는 드립 커피를 내리겠지.


글을 쓰지 않았다면 퇴사 몇 일 전이니 집세니 하는 지끈한 생각에서 좀 더 벗어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을 쓰지 않았다면 문장을 타고 여행을 떠나는 일 따위도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 동안 벼랑 끝에 몰린 것처럼 글을 썼지만, 나는 벼랑 끝이 아니라 그냥 이곳에 있다. 내 집, 내 의자에. 드립 커피를 마시면서.




지난 2년 동안 꽤 많은 살림살이들을 장만했다. 10년 넘게 이방 저방 옮겨 다니며 살다가 작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정착의 도구들을 불렸다. 처음으로 침대를 사고, 옷장을 사고, 커튼을 사서 직접 달았다. 또 전자레인지도 사고, 전동그라인더도 사고, 독서 조명도 업그레이드 했다. 솔직히 35살이 되어서야 약간 한을 풀었다. 하지만 동시에, 오랫동안 몸에 새겨온 노마드의 본성으로 열심히 비축했다. 300만 원이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150만 원 이상 저금했고, 그 돈으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지금은 필요한 물건은 다 가졌다고 생각한다. 더 갖고 싶은 것을 생각한다면야 끝도 없겠지만,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쌀과 신선한 원두가 있으니 한동안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회사에서 잘리고 전세 이자+세금으로 매달 통장이 털리는 것은 생각할수록 밸이 뒤틀리지만, 나에게 닥친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절약하며 버텨보려고 한다. 사실은 세상이 밉다. 그래도 이 모든 걸 버리고 떠나는 짓 같은 건 이제 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날 버려도 나는 마음의 문을 닫지 않는다. 끊임없이 나에게 약속할 것이다. 그리고 말해줄 것이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고생 많았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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