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출근 시간에 임박해서 도착하면 마음이 너무 팽팽해져서 임계치 직전의 기타줄처럼 터질 것만 같았는데, 이젠 1분 전에 도착해도 아무렇지도 않다. 이럴 수도있구나, 무심한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회사 메신저를 켰다. 이제 남은 기간 동안 퇴직 관련 서류들을 처리하면 된다. 오전에 회의가 있었는데, 나만 빠지기도 뭣해서 아이디어 회의에 참여했다. 느슨해진 마음으로 아무 말이나 던지다 보니 의외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회사명을 활용한 타이틀을 정할 때는 내가 왜 이런 걸 고민하고 있어야 하지 싶어서 다시 내 상황을 인지하게 되었다.
며칠 전 지원한 기업에서 AI면접에 응시하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갑자기 머리가 띵해졌다. 오후가 되니 갑자기 참을 수 없을 만큼 답답했다. 잠시 나가 회사 주변을 한 바퀴 걸었다. 이렇게 황폐한 마음으로 뭘 또 죽도록 해서 살아남아야 할까, 죽도록…… 죽도록 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데 아무것도 하기 싫다…… 신호등이 바뀌었다. 뛰어가면 건널 수 있을 텐데 뛰고 싶지 않았다. 초록색 숫자가 점점 움츠러들었다. 7, 6, 5, 4, 3, 2, 1…… 정말로 그만 뛰고 싶었다. 잠시 후 내 앞에 빨간색 불이 켜졌다. 또 한숨이 터져 나온다.
대학교 때 하던 취미 동아리 모임에서 운영을 맡고 있는데 더 이상 못하겠다고 카톡을 보내고 싶었다. 몇 달 동안 같이 준비한 신년회에도 불참했다. 단톡방에 그만두겠다는 말을 3번이나 썼다 지우고, 그 내용 그대로 친한 선배에게만 따로 보냈다. 바로 전화가 왔다. 결국 내 참담한 상황에 대해 다 얘기했다. 선배가 내 마음을 다 알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너는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어봤으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보다는 훨씬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만두지 말라고, 아무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되니까 끈을 놓지는 말라고 했다. 당장 그만두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이 일단 미루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붙잡고 있을 수 있다니, 뛰지 않아도 건너갈 수 있다는 건가, 도저히 놓아지지 않는 삶이 그렇다는 건가, 기적일까 거짓말일까.
"힘내"라는 말이 싫지 않았다. 진짜 힘든 사람에게는 힘내라는 말이 무용하다고, 어떠한 위로도 그 사람에게 가 닿지 못한다고 하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고마웠다. 겪어보지 못한 상황과 살아보지 못한 삶을 짐작하고 귀 기울여주는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타인의 불행에 대해 갈 수 있는 최선의 거리 아닐까. 지금 당장 힘내라는 말을 듣고 힘이 나지는 않지만, 삶의 어느 국면에서 문득 그 말에 엔진을 달고 달려 나갈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힘내라는 말이 나를 그저 쓰게 한다.
문장 하나에 목덜미를 부여잡고 펑펑 울다 잔 날이 있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고, 인류애가 바닥났다고 말하고 다닌 나에게, 그 말을 가만히 들어준 무수한 친구들에게,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인류! 사랑해, 울지 마! 살아가는 일이 너무 어려워서 목놓아 울던 밤에 너도 나도 아닌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외쳐주는 문장이 있었다. 심장이 멈춰버릴것 같았다. 빨간 불 앞에 서서 한숨짓는 나에게 다가온 '힘내'라는 문장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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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많은 협곡을 돌아
저 많은 태풍을 뚫고 집에 돌아와
겨우 잠이 든 시인이
이 세계가 멸망의 긴 길을 나설 때
마지막 연설을 인류에게 했으면 했어
인류!
사랑해
울지 마!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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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詩 「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中
아, 힘내라고 말해줘도 울고, 울지 말라고 말해줘도 우는 나는…… 나는 역시 지독히 말 안 듣는 청개구리고, 툭하면 뒷덜미 잡히는 방아깨비고, 제 풀에 지쳐 잠드는 개똥벌레다. 멀어도 아직 한참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