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린 주제에

퇴사 D-20

by 세라

요즘 내 모든 일상은 '잘린 주제에'로 시작된다.


잘린 주제에 지각? 오늘 아침 눈을 뜨니 7시 50분이었다. 50분...? 8시? 미친! 그 시간은 원래 회사에 도착해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업무가 한창 중인 시간이다. (평소 7시에 도착한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는 데다 강박까지 있어서 기상 알람을 5분 간격으로 10개 이상 맞춰놓는 사람인데, 그걸 다 못 들었단 말이야? 어째서 이런 일이? 생각이 '내가 이렇게까지 한다고?'까지 흘러갔을 때 나는 비로소 멈췄다. 아니, 니가 뭔데? 니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너는 원래 허술했어. 나는 항변한다. 나 이런 적 처음이야, 내 유일한 강점이 성실함인데? 내가 지금까지 빈 사무실에 문을 열고 불을 켠 순간들 못 봤어? 그는 씨익 웃는다. "역시 널 자르길 잘했어."


잘린 주제에 떡볶이? 그러고 보니 일주일 넘게 지출이 0이었다. 통장에서 전세 대출 이자가 3자리 수로 빠져나간 것은 너무 큰 트라우마를 형성해 버려서, 나는 아직 여진과 충격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이걸 적어도 6개월 동안 계속해야 된다고? 그러나 이틀 전 그야말로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은' 마음으로 퇴근길에 식재료를 사 왔다. 모든 것은 최저가로, 세일 상품으로. 떡 약 1000원, 어묵 약 1000원, 깐 양파 2개 3500원?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비싸니까 패스, 대신 양배추 한 토막 약 1300원,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대파 제일 작은 걸로 약 2000원. 가방에 식재료를 주워 담고 지하철을 타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웃겼다. 동네 사람들! 여기 제 가방에 떡볶이 재료가 있어요! 그리고 전 회사에서 잘렸어요!


잘린 주제에 드립 커피? 커피를 내려마시고 씻어둔 드립 서버를 정리하다가 실수로 와장창 깨뜨려 버렸다. 내 키 높이에서 탄력을 받고 떨어진 유리 서버는 산산이 조각나서 온 집안에 흩어졌다. 마치 마지막 내 수호신이 날 떠나버린 듯, 나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당신마저 날 떠나나요, 왜요, 도대체 왜? 커피의 신이 날 내려다보며 말한다. "You, are, fucking fired!"


잘린 주제에 책?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의 신간 소식을 알게 되었다.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몇 번이나 망설이다 결국 서점으로 향했다. 웬만한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보지만, 문장마다 자꾸 호흡이 거칠어지게 하는 책, 필사하다 보면 거의 모든 문장을 필사하고 말게 되는 책, 특히 그런 책이 집 근처 도서관에 없을 때, 나는 그 책을 구매한다. 책은 내 손이 닿지 않는 높은 위치에 딱 1권 꽂혀 있었고 나는 그 책을 가지고 싶어서 까치발을 하고 팔을 버둥댔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닿을 듯 말 듯 잡히지 않았다. 책은 별처럼 멀리서 빛나고 있었다. 너는 잡을 수 없는 별이야? 이룰 수 없는 꿈이야? 견딜 수 없는 슬픔이야?…… 사다리를 타고 하늘 끝까지 올라가고 싶었지만 사다리는 직원용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완고한 표정의 사다리를 내버려 두고, 좀 더 친절해 보이는 북 캐셔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분은 사다리 없이도 손을 쭉 뻗어 쉽게 책을 낚아채 주었다. 감사합니다, 저 사다리는 좀 못 됐어요 그치요, 당신은 저의 돈키호테예요……. 그런데 3500원짜리 양파 앞에서 벌벌 떨던 주제에 15000원짜리 책을 사다니, 너 어쩌자고 이러는 건데? 지금 반항하는 거야? 진짜 언제 정신 차릴래?


책의 맨 첫 장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조심해. 울다가 웃으면 어른이 된다.' 나는 충격을 받고 말았다. 나, 어른이었어? 이 내가……? 어른의 조건이 울다가 웃는 것이라면, 나는 도대체 얼마나 성숙한 어른이란 말인가.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어욧! 나는 뒷걸음질 친다. 아니야, 어른은 고작 이런 게 아니야. 난 그냥 울 테야. 난 그냥 웃을 테야.


한정원 「사랑하는 소년이 얼음 밑에 살아서」


금요일 저녁, 책상 앞에 앉아 111페이지의 작은 책을 한 번에 다 읽었다. 문장이 날 얼어붙게 한다. 문장이 내 영혼을 환하게 한다. 문장이 다정하게 나를 걱정해 준다. 문장이 지각과 떡볶이를 용서해 준다. 문장이 현실에 복종하지 말라고 한다. 허나, 양팔을 벌리고 날 안아주던 책은…… 어느새 등을 돌리고 홀쭉해져 있다. 나는 대체 어쩌자고 이러고 있는 걸까. 금리가 떨어질 일은 요원하기만 한데, 잘린 주제에 어쩌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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