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취해 있던 토요일이었다. 친구와 낮에 마신 술이 유독 깨지 않아나는 내내 들떠 있었다. 일요일 낮에 일어나 토요일 밤에 쓴 글을 지운다. 취해서 쓰는 글은 디지털 쓰레기통만 배불리는 한심한 일이라는 걸 이제는 쓰는 도중에도 아는데, 알콜이 만들어낸 허상의 자아는 마치 그 순간만큼은 내가 곱게 취했다고 착각케 한다. 나는 착각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혹시 취하지 않고 쓴 글마저 곱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참으로 무서운 생각이다.
어제는 내 가장 오래된 친구의 생일이었다. 어쩌면 친구를 만나러 나가기 전부터 취해있었던 것 같다. 친구에게 줄 손편지를 써서 내가 다시는 열어볼 수 없게 즉시 밀봉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왜 쓰는가 따위의 것들을 내버려 두고 대문을 열고 삶의 바깥으로 외출하는 시간.현실을 잊고 무언가에 취하는 시간들이 차악의 해답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토요일 한때 실업의 수치도, 가난의 슬픔도 다 잊어버렸다. 내가 편지봉투 속에 가두어 버린 문장들은 무엇이었을까. 그것도 이제 거의 다 잊어버렸다. 알콜의 힘이다. 친구는 편지를 읽고 울었다고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곳, 책상 앞이 내 삶의 중심부라는 것이다. 취해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즐거운 세상, 그곳은 삶의 변두리다. 대문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이 무구한 충동이 사실은 삶의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하고 있는 걸까 봐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너무 멀리는 가지 말자고, 잠시만,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라고 나를 붙잡고 말렸다. 지금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맨 처음 그곳만큼은 절대로 가고 싶지 않아서, 죽어도 싫어서, 나는 삶의 어느 낮은 문턱에 발을 걸치고 의미 없는 문장들을 이어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오늘까지 지원할 수 있는 채용 공고가 하나 있었다. 그래봤자 1년 계약직이지만, 직무와 경력이 딱 맞았다. 며칠 전부터 계속 미루다가 노트북을 열고 지금이라도 쓸까 말까 고민했다. 신산한 입사 지원의 역사 덕에 나는 수많은 버전의 자기소개서와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고, 오늘 당장 마음을 먹고 막차에 올라타고자 한다면 지각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뛰지 않았다. 모르는 얼굴들 앞에 연극하듯 입장해서 나를 전시하기 전에 나는, 알아야겠다, 지금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고 싶다, 이 허무한 인생이라는 게 당최 무엇인지. 태곳적부터 상처 입은 인류가 수없이 다녀온 흔적 없는 그곳, 아무것도 없어서 이름조차 없는 그곳에 나도 한번 기필코 다녀와야 되겠다. 나는 삶에게 기다려 달라고 빈다. 두 손 두 무릎 모아 간절히 부탁한다. 그 마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사실 모르지 않는다.
곧 회사에서 사용하던 모든 계정이 정지될 것이다. 반납과 만료, 인계 끝에 매일 내 것처럼 여기고 로그인하던 세상에서 완전히 내쳐지고 나면, 진정으로 무기 없이 생각해 보자. 카메라와 씬, 폰트, 편집 프로그램, 스타트 버튼, 그런 거추장스러운 것들 다 떼고 나와 너는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해야만 한다. 아직은 다른 계정으로 갈아탈 때가 아니다. 바야흐로 삶에게 던져야 할 질문들이 다시 이만큼 생겨났다. 그러니 삶아, 조금만 기다려 달라. 여기에 내가 이렇게 울면서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