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지막 생존 키트, 책

퇴사 D-5,4

by 세라

하루에 한 칸씩 계단을 내려오듯 일상적으로 D-day를 기록해 오다가 D-4에 이르러서야 새삼스럽게 놀란다. 내 마음은 한 칸씩 차분히 내려오지 못하고, 넘어지고 굴러 떨어지며 아슬히 따라오고 있었나 보다. 숫자의 힘이란 신기하다. 햇수를 세거나 사람의 나이를 세는 것 또한 무언가에 임박했음을 알라는 뜻에서일지도.


여태껏 써온 일기가 무색하도록 마지막 주말 내내 퇴사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온통 딴생각뿐이었다. 며칠 전 퇴사자에게 10만 원 상당의 선물을 하는 관행이 있으니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나는 온라인 장바구니에 담아둔 책과 스마트폰에 캡처해 둔 책 목록을 보면서 10만 원 치의 책을 고르다가, 잘렸단 사실도 잊고 순수한 즐거움에 잦아들었다. 가까운 도서관에 없는 책 위주로 골랐는데도 10만 원 치를 추리기 힘들었다. 퇴사하고 나면 당분간 수입 없이 미친 전세 대출 금리를 감당하며 지내야 하는데, 책이라니, 문장이라니. 나는 진정 제정신인가?


그러나 책을 비축하는 마음은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면 내게는 재난 대비 생존 키트가 책이란 말인가? 쌀도 아니고 물도 아닌, 생존에 있어 세상에서 가장 무용한 것이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은 것. 참으로 호사로운 취미. 종이로 지어진 도피성. 눈 가리고 아웅. 나는 무기 하나 들지 않은 무지하고 아둔한 적이자, 스크루지 영감 뺨치는 고집쟁이. 에라, 정녕 모르겠다. 죽는 김에 콱 읽어버리자. 태어난 김에 콱 써버리는 거다. (이렇게 까불다가 다시 또 현실의 감옥으로 철컹철컹 끌려들어 가겠지?)


요즘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꼭 한 번 이 질문을 한다. "앞으로의 계획이 뭐니?" 무한 반복되는 질문 앞에서 나는 쓴웃음으로만 대답해 왔다. 입사 지원은커녕 죽어라 글만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질문을 이렇게 되돌려주고 싶었다. "당신은 왜 살아요?" 나는 이렇게까지 궁지에 내몰려서도, 당분간 읽고 쓰기에 파묻혀서 지내고 싶다는 무지렁하고 낭만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매일 글을 쓴다는 것은 한 사람을 매일매일 전력으로 사랑하는 것에 비할 정도로 어렵고, 필사의 심력에 버금가는 단단한 체력까지 요한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았다. 무엇보다 빈천한 문장력이 나를 슬프고 부끄럽게 하는데…… 다만 내 글에서는 '읽기'나 '쓰기'가 '살기'라는 단어로 치환될 수 있음을 확인한다. 잘 살든 못 살든, 그러니까, 잘 쓰든 못 쓰든. 진짜로 미칠 것 같은, 미쳐버리고 싶던 순간들마다 글을 쓰면서, 나는 나의 폭주를 막았을 것이다. 실성했다고 고백함으로써 내가 진짜로 실성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것이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은 글쓰기를 사랑해 버린 자의 비정한 숙명인지도 모른다. 글을 통해 삶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면 할수록 더 생생한 삶의 고통 속으로 물경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나무

천상병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여기에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이 또 있다. 사람들이 모두 썩은 나무라고 하는데도 절대 아니라고 고집을 피우는 사람. 내가 '꿈속에서 확인'했으니 이게 맞지 않냐고, 바쁜 사람들을 또 한 번 불러다 놓고 진지하게 우기는 사람. 혹시 나도 이렇게 어린애처럼 굴면서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혹시 그동안 구조 조정과 퇴사라는 인생의 굴곡에 대해서 기록한 게 아니라, 궁극의 문장에 단 한번 가 닿기 위해 썩은 현실에서 발구르기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결국 남은 것은 평범한 불행에 대한 지루한 감상밖에는 없지 않은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사람들이 말하는 썩은 나무의 그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읽고 쓰는 일이 썩은 나무라고 말하는 현실에게, 나는 마지막 꽁돈으로 쌀 대신 책을 고름으로써 슬그머니 우겨 보는 것이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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