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많았고, 행복하렴

퇴사 D-3

by 세라

마지막 인사에 관해서라면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쿨한 적 없다. 역마의 인생 속에서 그렇게 많은 것들과 이별하며 살아왔으면서도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 것이 '이별'이다. 꼭 한 번쯤은 뒤돌아봐야 마음이 놓이고, 꼭 한 번쯤은 이름을 다시 부르고 상대방의 응답을 확인해야 겨우 발걸음을 뗀다. 인생이 만남과 이별의 학교라면 나는 영원한 유급생이자 부진아일 것이다. 집도 사람도 동네도 물건도 "안녕히 계세요!" 하고 한번 인사하고 단정하게 돌아서는 일이 나에게는 왜 이렇게 어려운지. (지금도 그렇지만 다 늙어서도 주책스럽게 살고 있을까 봐 가끔 두렵다.)


나는 습관적으로 무언가에 '우리'라는 말을 잘 붙인다. 우리 집, 우리 동네, 우리 회사. 원래 그랬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그렇기라도 할 것처럼, 우리 우리 우리. 그 사실을 몇 해 전 다름 아닌 글을 퇴고하면서 깨달았다. 그때 생각했다. 나 같은 인간은 이래서 더 자주 떠나야 한다고. 주기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이 이별에 대비하는 일상 훈련인지도 모르겠다고. 아무 단어에나 '우리'를 붙여도 어색하지 않아서 한국어가 좋았다. 우리 엄마, 우리 후배, 우리 강아지. 외국어로 번역하면 오역이 되는 표현. 너는 너 하나인데, 왜 우리가 되는 거냐고. 왠지 미스터리하고 은근히 시적이기까지 한 우리 언어가 나는 내심 자랑스러웠다. 그렇게 좋고 자랑스러운 것들에 늘 '우리'를 붙이곤 했다.


어쩌면 '우리'는 내가 더 많이 사랑하고 있음을 뜻하고 있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상대는 하나, 나는 여러 개. 내가 더 많이 내어주고도 좋다고 헤실거리는 표현. 비싸게 주고 사도 억울하지 않은 말. 내 안의 모든 나를 그러모아 헌사하고 싶은 단 하나의 상대에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라는 표현을 꺼내놓는 것일지도 모른다.


2년이라는 길다면 긴 시간 속에서, 내가 한 번도 무언가에 우리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을 리 없다. 나는 습관을 잘 못 고치는 사람이다. 이렇게 인정머리 없고 야멸찬 회사 생활 중에도 돌이켜보면 나는 잘 웃고 다녔다. 쓸데없이 미소 짓고 보는 것도 나의 둔한 버릇 중 하나다. 이 버릇 때문에 손해를 적잖이 보고 사는데도 고치려야 고쳐지지 않는다. 그렇게 웃으면서 우리 팀, 우리 선배, 우리 이라고 말한 적 있었을 것이다. 돌아오는 것이 굳은 표정이나 황당한 오해뿐일 때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라고 칭하던 것들이 있었다. 그 순간들을 다 잊고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기억이 났다.


마지막으로 높은 상사를 뵙고 인사를 했다. 일하면서 아쉬웠던 점도 진솔하게 말씀드리고, 앞으로도 보자는 말에 웃으며 대답하고 나왔다. 이미 이렇게 된 거 어쩌겠는가. 내 웃음은 진심이었다. 인사부와 퇴직 면담도 진행했다. 형식적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담당자분께서 터 놓고 귀 기울여주셔서 의외로 말문이 술술 터졌다. 두서없이 더듬는 말버릇이 놀랍게도 사라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곤조곤하게 고해성사했다. "이걸 어떻게 버티셨어요?" "세라님 진짜 착하시네요" "아니 이건 술 한잔 하면서 얘기해야 되겠는데요?" 하면서 친구처럼 들어주시기에 나도 모르게 수위를 점점 높여가니 어느 순간 "우와, 이거 진짜 어디 커뮤니티에 올라올 법한 이야긴데, OOO에 올리실 생각은 안 해봤어요?"라고 해서 뜨끔했다.(히융!) 한순간 또 진심이고 말았다. 오프 더 레코드 면담을 마무리하고 어디까지 기록에 올릴 것인지 적정선에서 합의(?) 후 후련한 마음으로 회의실을 나왔다.


인사발령으로 떠나간 분께도 따로 연락 드렸다. 작년에 말수 적은 나에 대한 한동안의 오해를 풀고 잘 챙겨주시던 분이어서 내내 진심으로 감사했다. 면담이 끝나고 와 보니 답장이 와 있었다.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마음이 아프지만, 더 좋은 곳에 가서 더 많이 빛나길 바랄게. 고생 많았고, 행복하렴."


평범한 마지막 말이 자꾸 위장을 맴돌아서 자리에서 뜨지 못하고 여러 번 다시 읽었다. 오늘도 액체처럼 찰랑찰랑해진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오후의 한강을 달렸다. 저 멀리서 윤슬이 파도처럼 뒤따라왔다. 내게서 뒤돌아설 일 같은 건 없다는 듯이. "안녕히 계세요"를 여러 번 말해야 하는 날이어서 힘들었는지, 집에 오자마자 2시간 동안 쓰러져 잤다. 이제 남은 이틀은 휴가다. D-day에는 "안녕히 계세요"를 말하고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