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하게 즐거운 퇴사 전야제

퇴사 D-1

by 세라

드디어 퇴사의 그날, D-day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마지막 출근을 앞둔 밤. 놀랍게도 다시 은은한 광기가 차오른다. 이런 걸 회광반조라고 하는 건가. 새벽에 잠에서 깨어 버스에 버스를 타고 회사를 향해 달려가 지겨운 내 자리의 컴퓨터를 켤 생각을 하니, 지금까지 몸부림쳤던 모든 일요일 밤을 다 모아 불린 것처럼 끔찍하다. 출근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시스템 메시지가 뜨겠지. "업무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파이팅 하세요!" 이 자식들, 업무 시작 안 할 거야. 파이팅 안 할 거거든?


나는 1인 가정의 가장으로서 혼자 엄마 몫도 하고 아빠 몫도 하고 애 몫도 하고 사는데, 내가 가장 자주 연기하는 건 엄마다. 나 자신의 엄마가 되어서 잘 먹이고 잘 재우고 괜한 투정도 다 들어주며 다독이는 모드. 엄마가 바쁠 땐 아빠 모드로 전환한다. 가끔 외식도 시켜주고 강제로 운동도 시켜주고 쓸데없는 농담으로 웃겨주기. 애 모드는 두말할 것도 없다. 밖에서 어른인 척하고 있던 자아를 벗어던지고 금쪽이처럼 마구 나 자신이 되는 거다. 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오빠 몫을 좀 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실제로 오빠가 없기 때문에 상상이 잘 안 되지만, 가령 이런 느낌이다. "감히 내 동생을 지금까지 이렇게 괴롭혔어?" (너무 귀엽나? 이건 현실 고증의 실패.)


약 40일 동안 퇴사 일기를 쓰면서 착한 글은 얼마나 썼는지 점검해 본다. 감사는 할 만큼 했는가? 실수에 대한 반성과 자기 점검은? 뜨악한 은행 금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곧 쫓겨날지도 모르는 전셋집도 구석구석 청소했다. 세상이 언제 또 무엇을 앗아갈지언정, 매 순간 염결할 것. 특히 오늘 같은 날은 더, 수녀와 사제와 스님과 목사의 마음으로 도를 닦아야 한다. 이건 바로 내일의 광기를 벼리는 순수한 열정.


쓸쓸한 애상과 감사의 일기는 끝났다. 사는 게 너무 드난하고 서러워서, 소처럼 성실했던 지난 세월에 대한 찬사가 조금은 필요했다. 내 정신이 말라비틀어지도록 학대하고 매장시킨 사회의 악마들에게는 아름다운 문학을 허락하지 않겠다. 어차피 질 싸움이어도 굴하지 않을 것이다. 엄마, 아빠, 없던 오빠까지 불러내어 대동했다. A부터 Z까지 모든 친구들을 데려가야지. 매달 통장에 월급 넣어줬다고 내가 개돼지인 줄 알았느냐. 쓰고 버리면 순순히 쓰레기장으로 걸어갈 줄 알았더냐. 먹고사는 일에 치여서 모멸감 다 잊을 줄 알았더냐. 혹시 이 소리도 다 멍멍꿀꿀로만 들리냐. 너희가 아무리 날 잘라도 나는 내 삶에 딱 붙어 있을 거야. 절대 나가떨어지지 않을 거야.


내일은 원피스를 입고 나가야지. 사는 게 아무리 추접하고 비정해도 봄날의 햇살처럼 밝고 따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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