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지 10일. 누가 뭐래도 제1의 버킷리스트였던 '실컷 잠자기'를 성실하게 실천했다. 그렇다, 난 뭐든 좀 성실하다. 수면 패턴은 엉망이 되었지만 잠의 양이 확 늘어난 것만으로 이 세계가 낯설어 보인다. 친구들이 새벽마다 깨어나 시에 취해 있는 나에게 천상 예술가라고 한다. 나는야 예술적으로 잠자는 백수. 그 외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래요.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집은 '잠자는 곳'으로 주로 기능해 왔다. 그런데 근래 들어 내가 집에서 도통 나가질 않으니, 공간이 마치 나를 무거워하는 것만 같았다. 수조에 물이 딱 맞게 차 있을 때 사람이 들어가면 물이 '출렁' 넘치는 것처럼. 집아, 내가 이렇게 오래 앉아 있는 게 이상하니? 내가 이렇게 말을 거는 게 싫니? 우리 같이 사이좋게 빈둥거려 보자니까?
그동안 하루하루 회사에서 집까지, 상처 입은 마음을 잘도 실어다 날랐다.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날카로운 말과 냉소적인 표정을 한없이 곱씹으며 날 것 그대로, 싱싱한 내장 덩어리처럼, 책상 위에 올려두고 저녁마다 노려보았다. 마치 소중한 것 대하듯 애지중지. 이 집착을 멈추게 하는 건 퇴근이나 퇴사가 아니라, 깊고 긴 단잠이었다는 걸 이제야 안다.
[Shift+E]
비활성화 모드
각종 영상 프로그램을 넘나들던 내 계정은 만료되었지만, 손에 여전히 많은 단축키가 익어 있다. 프리미어에서 이 키를 누르면 선택한 영상 클립이 회색으로 음영처리되면서 비활성화된다. 트랙 위에 올려져 있지만 아무 색깔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다. 어떤 순간은 그렇게 '잠재움'으로써 완성된다. 뭐든 망설이는 성격 때문인지 이 단축키를 유독 자주 사용했던 것 같다. 썼다 지웠다 하는 문장처럼 그토록 껐다 켰다 했던 걸까. 그런 문장들은 대부분 마지막에 지워졌다. 이전과 이후, 그 사이의 군더더기 같은 시간. 끄고 싶다. 내 삶도 그렇게 편집할 수 있다면. 그러나 안 되겠지.
살면서 다음 순간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억하는 일일까, 잊는 일일까. 그러나 방송 업계를 떠나겠다는 다짐만은 변함없다. 절규와 굴욕의 시간이,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만으로 향기로운 추억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한번 흘러넘친 공간은 이제 내 무게를 받아들인다. 자고 일어나니 매일 밤 울면서 일기를 썼던 일이 수 세기 전의 일 같다. 내 마음은 더 많은 것, 더 구체적인 것들을 고발하고 싶어 하는데, 내 몸은 그 모든 걸 잊어버리라고 말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문장이 '뭐라도 하고 싶다'는 고백으로 변질되는 순간, 다시 잠재워야 한다. 자장자장, 잠들거라, 아무것도 하지 말거라.
모를 일이다. 어느 봄밤 눈물 쏟으며 애먼 사람 붙잡고 살아온 이야기 떠들어대고 있을는지.
*헤드라잇 이라는 곳에서 작가 제의를 받았습니다. 며칠간 고민해 본 결과, 제 부끄러운 개인사가(잘린 게) 뭐 자랑이라고 원고료를 받나 싶었어요. 책으로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어그로, 터치, 스크롤 업, 스와핑…… 디지털 콘텐츠의 세계에서 저는 역시 좀 둔하고 무거운 사람인가 봅니다. 돈을 받는 순간 어떤 악플도 변명 없이 감수해야 할 것 같고요. 간이 작은 저는 오늘도 비겁하게 변명만 늘어놓고 도망갑니다.(!)
*퇴사 후 묵은 삶을 정비하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분들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에너지는 다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인풋과 아웃풋이 투명하고 정직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 그치만 저는 예술성과 성실함이 공존하는 이상한 사람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