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살구나무 아래에서 있었던 일이었어요. 산그늘이 스란스란 세상을 뒤덮고 있는 시간이었죠. 저는 그 순금 같은 타이밍을 놓칠 수 없어 분주하게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노인이 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사진작가인가 봐요?"
"아니요, 그냥 취민데요……."
노인은 자신의 조카손주도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카메라를 들고 천지로 돌아다니더니 유명한 신문사에 들어갔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좋아하는 걸 계속해야 한다고요. 꽃이 이렇게 예쁘니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노인도 이건 몰랐을 겁니다. 저는 그 조카손주보다 아마도 훨씬 더 나이가 많을 거고요, 이미 십여 군데 크고 작은 회사를 다니다 나왔고요, 좋아하는 것만 하다가 낙오되어 동네 뒷동산만 쓸쓸히 걷고 있었다고요.
"내 사진도 좀 찍어주시오."
노인은 해진 폰케이스를 열어 카메라 어플을 켜고 저에게 건넸습니다. 그리고 저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습니다. 꽃을 배경으로 찍어달라는 둥, 산을 배경으로 찍어달라는 둥, 심지어 이곳은 역광이라서 얼굴이 잘 안 나온다는 둥.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어요. 허 참. 저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은근하고도 짙은 노을빛이 낮과 밤을 갈라놓는 몽환의 순간, 그 시간에는 보물 같은 풍경이 주렁주렁 열리거든요. 가장 탐스러운 사진은 그때 영글죠. 그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는 노인이 늘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노인의 사진사 노릇을 해야 했으니까요. 노인은 계속 말했습니다. 저기 저 바위는 비봉이에요. 그리고 저기는 OO바위, 저기는 OO바위……. 젊어서는 참 많이 올라갔는데 이제 팔십이 넘으니 못 올라가.
왜 그러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뿌리치지 못하고 따라다니다 빛이 거의 다 스러진 뒤에야 다시 살구나무 아래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쉬운 대로 다시 열중하다 보니 어느새 노인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사방 어디에도 흔적이 없었습니다.
빈 의자에 앉아 멀리 바위를 바라보니 과연 험준하고 웅장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닿지 못할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노인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이제 팔십이 넘으니 못 올라가…… 이제 팔십이 넘으니 못 올라가…….
그 노인, 어디서 온 걸까요. 예쁜 꽃이 폈으니 사진을 찍어야 한다던 노인, 자기 얼굴도 좀 찍어달라던 노인. 아! 갑자기아득한 전생이 떠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잊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혹시! 혹시 내가 본 건, 노인이 아니라 세상에 소풍 나온 살구나무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저는 여전히 꽃 사진을 찍고 있었던 겁니다. 하필 거기서 노인이 나타난 것도, 하필 거기서 노인이 사라진 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겁니다. 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쓸데없는 욕심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놓칠 뻔했잖습니까. 바람이 불자 늙은 살구꽃잎 몇 장이 흔들리며 떨어졌습니다. 이제 막 지상에 도착한 꽃망울들이 태어나려고 꿈틀대던 걸 본 게 불과 일주일 전인데요. 아닌가, 팔십 년 전일까요. 꽃이 떨어진 자리에 사진 속 노인이 허허 웃고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살구나무가 가르쳐 주었지요. 인생은 짧으니 좋아하는 걸 하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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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 속 사진들을 차례차례 정리하려 했는데, 갑자기 영감님(!)이 오셨지 뭐예요. 끌리는 대로 먼저 끄적끄적해봅니다. 모두 따뜻한 봄날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