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진달래에 대한 글을 써 볼까, 사랑에 대한 글을 써 볼까, 이딴 고민이나 하고 있던 백수의 밤, 스카우트 제의 전화를 받았다. 어쨌든 업계에 있었던 경력이 길다 보니 이런저런 소문이 도는듯하다.
구조 조정과 퇴사의 상처가 여전히 찢어발겨진 채 컹컹 살아 숨 쉬고 있는데, 사실 내가 당장 먹고살 길은 이것뿐이다. 이런 고민은 당연히 처음이 아니다. 파란만장한 이직의 경력이 증명하듯, 얼마나 많이 그 진흙탕으로 되돌아갔는지 모르겠다. 그래, 진흙탕 아닌 곳이 어디 있으랴마는. 내가 여전히 아주 조금은, 이 일을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돌아간 적도 있고, 내가 그래도 다른 것보다는 이것을 '잘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돌아간 적도 있고, 당장 굶어 죽을 수는 없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돌아간 적도 있다. 다양한 이유로 무수히 돌아가서 경력을 이어왔다. 이제는 이 억겁의 고리를 끊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보다 더 극한, 세상에 새로 태어나는 아기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태곳적부터 그랬듯, 삶이란 건변함없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인가. 나고 갈 때만 그런 게 아니라 먹고사는 매순간이 늘. 밥벌이 앞에서 쉽게 가벼워질 수 있는 사람, 어디 있는가. 있다면 내게 말해달라. 약 올리는 것이어도 좋다. 그냥 그런 삶도 존재한다고, 조용히 손이라도 들어달라. 미련 없이 내가 나를 즈려밟을 수 있게. 밥벌이 없이는 해탈도 없다. 그러나 밥벌이 속에서의 해탈은 더더욱 요원하다. 아, 이 재미없는 삶. 이 '밥통적 존재'의 삶이 도대체 무어라고 이렇게 매일매일…….
이젠 정말 현실적으로 배가 고파 오는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선적으로
채워져야 할 밥통을 가진 밥통적 존재인 나는,
아니 몸 전체가 정신 전체가
커다란 빈 밥통이며 빈 밥그릇인 나는……
그만 쓰자, 안녕.
-최승자 詩, 「산산(散散)하게, 신(仙)에게」中
나도 쓰는 일 따위 그만두고 밥그릇을 들고 거리로 나서야 한다. 안 해보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알바를 해 봤던가. 별 일을 다 해봤다. 어려서는 수학 과외, 영어 과외, 악기 과외, 그 외에도 서빙, 카페, 숙박 업소 청소, 엑셀 통계, 플룻 연주, 예식장 연주, 사진 촬영, 전단지 배포, 유튜브 편집, 토스트 만들기, 떡 포장, 족보 찾기, 묘지 앞 꽃집, 홍삼 홍보, 옷 판매, 도서관, 실험실…… 그나마도 다 기억이 안 난다. 그래, 쓰다 보니 모두 과거의 일이다. (또 시작된 인생 타령. 그만하자. 맞아요, 이건 한잔하고 쓰는 글.) 그런데 도무지 쓰는 일 말고는 나를 살아있게 하는 일이 없다. 쓰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만날 수가 없고, 쓰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일도 하고 싶지가 않다. 쓰는 일이 나를 숨 쉬게 한다. 쓰는 일은 나의 기초체력이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쓰면서 살아왔다. 글쓰기라는 노동은 보수 없이도 늘 웃는 얼굴이었다. 물론 이렇게 비장해질 것 또한 없다는 것을 안다. 쓰는 일은 돈 버는 일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서. 개똥도 아니라서. 그런데 나는 도대체 왜! 왜? 왜……
커리어상 내가 적격인 듯한 자리들이 있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눈에도 잘 보이는 듯하다. 그러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제안하는 거겠지. 그런데 오늘은 내 깊숙한 곳에 은둔하고 있던 반항아가 웬일로 대쪽같이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는, 소맷자락 휘날리며 단호하게 "No"라고 말한다. 처음 듣는 이 묵직한 목소리.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No. 평소 침묵을 유지하는 그의 말은 힘이 세다. 나는 그의 완강한 의지에 놀라며 이토록 쉽게 흔들리는 증오와 환멸을, 다시 한번 다잡는다. 이 모순 덩어리의 삶. '묻따않' 살아지는 이 지긋지긋한 삶.
누가 찾아냈나, 여린 조개처럼 고개를 내밀고 세상을 염탐하던 나를. 그들은 나를 한번 툭 건드렸고, 나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나를 찾지 마세요. 그런데 나를 잊지는 마세요. 웃기죠, 이런 말?
나의 스승이자 연인이자 경쟁자이자 구원자이신 수많은 작가님들께 묻는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쓸 수 있습니까. 그냥 너 따위는 자격이 없다고 말해주실래요. 지금의 수치스러움과는 비교도 안 되게 수치스럽게 엉덩이를 걷어차주실래요. 그럼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을게요. 어떤 악기도 연주하지 않을게요. 희망 없는 삶으로 입 닥치고 순순히 돌아갈게요.
그래서 내일 오전까지 말해주기로 했는데 나는 또 새벽까지 이러고 있다. 진달래에 대한 글을 써 볼까, 사랑에 대한 글을 써 볼까.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는지. (큭, 이제 다 크다 못해 쪼그라드는 나이인데.) 내가 아주 열심히 책을 읽거나 글을 써서 될 수 있는 최대치가 유명한 인스타그래머나 블로그 인플루언서 정도에 그친다 해도,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주었음 한다. 무명으로 시작해 무명으로 끝난 내 삶의 구석구석, 초라한 하숙방에서조차, 글 쓰는 일을 누구보다 사랑했단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