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하얀 구두는 어디로 갔을까

퇴사, 그 후

by 세라

퇴사 후 읽고 쓰는 일에 파묻혀 산다. 하루가 텅 빈다면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운동하기, 친구들에게 편지 쓰기, 오전에 카페 가기 등), 막상 퇴사하고 나니 아무것도 실천하지 않고 있다. 다만 내 생활은 극도로 단순하게 요약된다. 읽고 쓰기. 브런치에서 몇몇 분들이 '작가'라고 불러주시지만, 스스로 진정한 작가라고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나는 그저 '책읽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 또는 '글쓰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 그런데 이렇게 하루종일 읽고 쓰는 동안에는 정말로 작가의 삶에 물경 다가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른 모든 것은 단순하다. 오직 읽고 감탄하며, 쓰고 고치고 지우고 또 쓴다. 그마저 지우고 싶지만 그래도 용기 내서 써 본다. 결국 부스러기 같은 글만 남는다. 읽다가 쓰다가 울기도 한다. 드물게 잦아드는 영감 및 모든 순간적인 잡념들을 메모한다. 영감은 내 영혼을 끝도 없이 부풀리다가도 손으로 잡으려 하는 순간 비눗방울처럼 사라지므로. 어쩌면 이게 내가 가장 원하는 형태의 일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게 착각이거나 망상일지라도.


오늘은 그저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쓰고 있다. 언제는 안 그랬냐마는. 내 글쓰기는 화이트 스크린 앞에 무연히 떨어지는 글감을 받아쓰는 게임 같다. 오후에 책을 읽다 '신발'이라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단어를 본 이후 갑자기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내가 쓰레기통에 대차게 버리고 나왔던 하얀 구두가 생각나 버린 것이다. 두 달이 넘도록 그 구두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구조 조정을 통보받았던 바로 그날이었다. 비참한 결과를 듣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던 후배들이 나에게 다가와 얘기는 잘했냐고 물었다. 아무도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반쯤 장난이었다. 나는 차마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후배 한 명이 슬슬 눈치를 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맥주 한잔 하러 가실래요?" 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안 되겠어. 극한 상황에서는 으레 본능이 나를 지킨다. 술이 들어가면 무슨 사고를 칠지도 모르겠다는, 어떤 예감 같은 것이 있었다. 후배들이 의자를 끌고 자리로 돌아갔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사무실 자리 밑에 놓아두었던 비상용 구두, 윗사람들이 내려오거나 윗사람들을 촬영하러 갈 때 신던 구두, 하얀 구두 한 켤레를 꺼내서 단호하게 쓰레기통에 처넣고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고 밝게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나중에 들어보니, 내가 그렇게 나간 뒤에 분위기가 싸해져서 남은 사람들끼리 아무 말도 못 했다고 한다. 돌아보니 괴기스러운 순간이다. 삶에서 몇 번 그렇게, 나의 똘끼가 분출되는 때가 있다.


그런데 왜 하필 구두였을까. 왜 괜히 구두에다 성질을 부린 건가. 쓰레기통에 박아버리다니,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충동으로. 생각난 김에 사진첩을 뒤져보니 2019년 8월 26일 퇴근길에 찍은 사진이 딱 한 장 있다. 그때는 상암동이었다. 나의 퇴근길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구두, 4군데 회사를 함께한 구두, 넉살 좋은 아저씨가 깎아준다고 해서 길거리에서 2만 원인가 3만 원인가 주고 샀던, 그러나 내가 많이 좋아했던 싸구려 그 하얀 구두. 사진 속 구두는 이런 식으로 버려지리라고는 꿈에도 모른 채 해사한 표정으로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내가 세상에 소리 내어 퍼부어야 했을 욕을, 말 못 하는 구두가 애꿎게 대신 받아주고 갔다. 구두는 내가 싫었을 것이다. 구두는 나를 미워하고 있을 것이다.


평소 구두를 잘 신지 않는다. 높은 구두는 가져본 적도 없다. 구두를 잘 신고 다니는 사람들이 예뻐 보이지만, 나는 발도 아픈 데다 잘못하면 계단에서 넘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느낌이 싫어서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안 신는다. 버리지 않았다면 더 오래 신을 수 있었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제 구두를 신고는 어디로도 가지 않겠다는, 아니면 그 어디에도 구두를 신고는 가지 않겠다는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을까. 회사 따위를 위해 아끼는 구두를 신는다면 발목을 영영 잘라버리겠다는 선언 같은 것이었을까. 구두는 책상 밑에서 오직 나만 기다리다가 나에 의해 버려졌다. 구두에게 나는 갑이었을까. 값싸게 사서 함부로 쓰다 버리는 갑이었을까. 구두는 혼자서 걸어갔을까. 멀리멀리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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