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개사에게 소고기를 얻어먹다

전세사기 1화_ 계약

by 세라

여름이었다, 프랭크를 만난 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을 공인중개사라 소개했다.



저 노트가 낡기 전, 2022년이 되기도 전부터 나의 첫 목표이자 마지막 목표는 '이사 잘하기'였다. 어언 15년, 장장 14군데의 길고 긴 단칸방의 역사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고 투룸으로 업그레이드하리라! 그것은 눈물겹고 콧물겨운 내 필생의 숙원이었다. 좁아터지고 덥고 춥고 어둡고 퀴퀴한 방에서 누구보다 간절히 벗어나고 싶었다. 그건 욕망이었을까. 비교적 안정적인 대기업으로 이직한 후 1년 반동안 악착같이 보증금을 모았다. (처음으로) 보너스가 들어오면 한 푼도 쓰지 않고 그대로 저금했다. 바야흐로 집 계약 종료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아, 이번에야말로!


그러나 이루기 쉬운 꿈이 있던가. 부동산 시장은 잔인하게도 내 이사 시기에 맞추어 급상승의 그래프를 그리고 있었다. 느닷없는 경제 부도의 시대가 왔다. 분명 주변 친구들이 사는 투룸 전세가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부동산 방문, 직거래 사이트, 집 구하기 어플 등으로 여러 차례 둘러봤지만 업그레이드는커녕 다운그레이드나 안 하면 다행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자취방 에어컨은 고장 나서 물이 줄줄 새며 곰팡이 악취가 나고 있었고, 어디든 빨리 다음 집을 정해야 했다. 아악, 젠장.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세요!


몇 차례 발품을 하는 동안 제한 시간은 임박해 버렸고, 프랭크를 만나는 날에야말로 무조건 다음 집을 정하고 말겠다고 굳게 결심했던 차였다. 그는 한 어플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한편 나의 오랜 친구 소울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이사 시기가 한 달도 차이 나지 않아서 같이 가보기로 했다. 이웃집으로 구하면 더 좋겠고.


프랭크와 함께 여러 집을 둘러봤지만 그날도 역시 적당한 곳이 없었다. 집이 너무 별로거나, 괜찮으면 조건이 아슬아슬하게 맞지 않았다. 1순위와 2순위였던 A구와 B구를 하루종일 둘러보고 낙담하는 우리에게, 프랭크는 C구를 제안했다. 고객님들에게 딱 좋은 곳이 있는데 아까워서 그러니 A랑 B만 고집하지 마시고 C도 한 번 보시라 했다. C구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곳이지만, 그때 소울이 살고 있는 곳이었고 내 직장과도 멀지 않아서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C구에 가 보니 집들이 다 괜찮았다! 모두 신축 빌라였는데, 우리의 오랜 로망이었던 넉넉한 방과 거실을 완벽히 갖추고 있었다. 몇 인치인지 가늠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TV와 빌트인 냉장고도 있었고, 진짜 부엌다운 부엌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전세가를 듣는 순간 뭐야, 싶었다. 당연히 안 되는 금액인데 왜 데려온 거야? 실망하며 돌아서려던 참이었다. "근데 이게 방법이 있어요!" 프랭크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현관문을 닫고 우리를 집중시켰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 달에 20만 원으로 살 수 있다는 거였다. 신축 빌라를 처음 분양할 때는 가격이 비싸서 주어지는 혜택이 있는데, 가령 전세 대출을 받아서 한 달에 이자가 100만 원이 나오면 그중 80만 원을 지원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마치 은행에 있는 대출 상품처럼 설명했다. 이제 거의 다 나가고 딱 두 집 밖에 안 남았다고 귀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시원, 하숙방, 작은 원룸에만 살아봐서 개념이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스마트폰 공시지원금 혜택 같은 걸로 이해했다.


나는 직장인으로서 신용이 있어서 전세 대출이 가능했으나 가진 돈이 너무 적었고, 소울은 보증금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으나 비영리 단체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라 대출이 불가능했다. 우리 둘의 부족한 점을 합쳐 보니 완벽한 그림이 나왔다. 심지어 월세 20만 원을 반으로 나누면 10만 원. 2년 동안 서로 배려하며 잘 살기만 한다면 저금도 지금보다 훨씬 많이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원래 전혀 없던 옵션이긴 했지만, 고민 끝에 결국 같이 살기로 결정했다.(쉽게 결정한 건 아니다. 고민 과정은 생략한다. 프랭크는 우리에게 고민할 시간을 많이 주지 않았다.) 프랭크는 우리에게 갑자기 왜 이렇게 똑똑해졌냐며 크게 기뻐했다. 그는 우리를 곧장 부동산으로 데려 갔고, 거기서 내 이름으로 전세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수 천만 원의 계약금을 송금했다. 여러 관계자가 우릴 지켜보는 가운데, 계약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집주인(건축주)을 직접 볼 수 없었던 게 마음에 걸렸지만, 분양팀이 법적으로 위임받았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기연가미연가하는 사이에 모든 게 다 끝나 있었다. 살면서 보내본 돈 중 가장 큰 금액이자, 내 재산의 전부였다. 진정한 어른의 세계 같았다. 이런 게 전세 계약이라는 건가? 이삽십대 내내 열정 페이로 고생하며 한 푼 한 푼 모은 돈이었기에 자꾸만 손이 떨렸다. 친구야, 우리 앞으로 예쁘게 잘 살아보자.


계약이 끝난 뒤 프랭크는 오늘 기분이 너무 좋으니 저녁을 쏘겠다고 했다. 그가 데려간 곳은 소고기집이었다. "네????? 소고기요????????"라고 반응하는 우리에게 자신은 한번 맺은 인연은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이라며, 대신 다음에 친구들이 이사할 때 꼭 자기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2년 뒤에도 좋은 혜택을 많이 알려주겠다고 한다. 주변에 자취하는 선후배가 많아서 진짜로 가능한 많이 소개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땐 왜 몰랐을까. 이 세상에 대가 없는 소고기는 없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어색해서 폰으로 고기 사진을 찰칵찰칵 찍었고, 그런 우릴 보며 프랭크가 뿌듯하게 웃었다. 우린 그 순간을 두고두고 인생에서 가장 병신 은 순간이라 평한다. 지금 막 전세사기를 당한 것도 모르고 소고기 인증샷이나 찍고 앉았다니. 안쓰러워서 돌아버리겠네. 역시 소고기 사주는 사람은 주의해야 한다. 순수한 마음은 돼지고기까지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름, 지명, 금액 등의 세부적인 정보는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가상으로 설정했습니다. 2022년에 실제로 겪었던 일이며 음성녹음본과 카톡, 문자 증거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단 한순간의 실수로 인생 묶이게 되는 겁니다.


*매일매일 쓰려고 했으나 감기가 낫지 않아 속도가 안 나네요. 컨디션이 허락하는 내에서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특정을 피하기 위해 요약하거나 생략한 부분이 많습니다. 실상은 더 엉망진창입니다. 이러든 저러든 섣부르고 멍청한 결정을 하고 당시 주변에 혼날 만큼 혼났으니, 더 이상 혼내진 말아주십쇼...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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