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내 방에서 슬금슬금 흘러가고 있는 '시계'와 눈이 마주쳤다. 찾았다! 내 방에서 시간을, 밤과 낮을, 한 세계를 째깍째깍 작동시키고 있는 사물의 정체. 나는 한순간 시계의 급소를 노려 '순간'에 깃발을 꽂았다. 시계가 머금고 있던 시간이 콸콸, 방바닥에 쏟아졌다. 나는 허리를 굽히고 바닥에 널브러진 시간을 그러모았다. 그때부터 내 방에서 시간의 흐름은 멈추었다. 시계의 휴식. 시계와 시간의 분리. 이제부터 내 시간을 결정하는 것은 나다.
물 흐르듯 살고 싶다, 라는 말은 언제나 거짓말이었다. 내 마음은 머물러 있는 걸 좋아했다. 붙잡고 싶은 순간을 붙잡기 위하여, 사실은 도망치고 싶은 순간에게서 도망치기 위하여, 나는 그토록 많은 사진을 찍었던가. 그 사진들을 다 이어 붙이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영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영상보다 사진이 더 좋았다. 시퀀스보다는 프레임을 사랑했다. 더 깊이, 더 오래, 순간 속에 머무르기. 그것이 '미련'의 다른 이름일지라도. 그러나 붙잡을 것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른 방법이 없는 걸.
쓰는 일이 고독해서라는 건 알았다. 그러나 읽는 일이 고독해서라는 건 몰랐다. 나는 술잔에 시를 곁들여 마시다가, 단편 소설집을 펼쳤다가, 옛 철학자들의 아포리즘을 기웃거린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다가, 선물 받은 책을 읽다가, 해가 지면 집에서 1시간 거리의 서점까지 설레설레 걸어가 이 책 저 책 염탐해 본다. 조각조각 읽다가, 조각조각 쓰다가, 혼잣말한다. '완성은 없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북한산 능선 위로 얼룩진 구름이, 얼룩진 구름 위로 하얗고 거대한 달이 떠 있었다. 슈퍼문이었다. 저 가득함, 저 충만함, 저것은 내 것이 아니다. 쓰면 쓸수록 조각나는 내 글은 시린 초승달이자 굽은 그믐달. 나는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젖혀 슈퍼문을 올려다보았다. 무엇이 나를 멈추게 하는가. 고독, 그것은 고독 때문이었다. 시계 이야기를 하다가 사진 이야기를 하는 것도, 사진 이야기를 하다가 책 이야기를 하는 것도, 고독 때문이었다. 그날 밤, 책 속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카메라를 쥔 사람은 피사체에 조심스럽게 초점을 맞춘 뒤 방아쇠를 당기듯 셔터를 누른다. 찰칵. 그 찰나 피사체는 필름 속에서 영구적으로 정지된다. 총에 맞아 죽는 것과 같이 피사체는 필름 속에서 영구 정지되면서 죽음을 맞는다.] *장석주, <철학하는 사물들>
사진은 '시간의 죽음'이라는 내용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마치 지난밤 내가 시계를 '찰칵' 부수어 버렸다는 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사라진 것을 붙잡고 있는가? 덧없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가? 아름다운 세계를 갈망하고 있는가? 서슬 퍼런 질문들이 내 급소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나는 찰칵찰칵 뒷걸음질 쳤다. 환한 달빛이 플래시처럼 펑펑 터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순간을 이어 붙이는' 직업으로 먹고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이어 붙이지 않고, 그저 순간 순간에 불규칙하게 머무른다. 조각난 시간. 조각난 독서. 조각난 마음. 지난밤 나는 아름다운 순간을 구원하기 위해 방아쇠를 당겼던가. 방바닥에는 기억의 피사체들이 뒹굴었다. 부서진, 부서져서 더 아름다운. 시간은 죽었다. 그러나 죽은 시간만이 나를 구원한다. 지금 이 순간도 이윽고 하나의 피사체가 되리라. 찰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