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라 Aug 08. 2023

참회와 고독을 그만할래

 나는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것을 반성하는 사람이다. 일단 이렇게 '나'로 시작하는 문장을 쓴 것부터 반성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나로 시작되는 다음 문장을 궁리하고 있으니, 방금 '반성한다'는 문장을 쓴 것도 반성한다. 반성을 반성한다. 반성의 반성을 반성한다. 반성의 반성의 반성을 반성한다도대체 내 글에는 왜 이렇게 '나'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가? 나는 부끄럽다. 다시 나는, 부끄럽다. '나는 부끄럽다'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패러독스다. '나'라는 단어를 쓰면 쓸수록 나는 고독해진다. 반성을 하면 할수록 반성할 거리가 늘어난다. 거울 속의 거울처럼 무한히 반사되는 고독과 고독과 반성과 반성.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고독하게 반성하며 '나'를 지워버리고 나면, 다음 순간 나를 지워버린 나를 반성하는 고독한 내가 나타난다. 또 '나'를 쓰면서. 미칠 노릇이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반성은 자기혐오다. 자기 자신이 하찮게 느껴질 때 인간은 뭔가 반성할만한 건수가 없는지 두리번거린다. 자아를 성찰할 바에야 아무 생각 없이 잠자리에 드는 편이 낫다. 자신이 증오스러울 땐 자는 것이 최고다.]


그렇다. 자아 성찰을 하면 할수록 황폐해지기만 하는 나는, 이러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어디 가서 한뎃잠이라도 자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에게는 마음껏 푹 잘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쇼펜하우어는 불면증 환자를 고려하지 못했다. 불면은 퇴사 후에도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불면의 밤, 나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듯 나를 쓰고 지운다. 쓰고 지운다. 똑같은 단어들의 무한반복뿐, 더 나은 글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나아가려 할수록 되돌아가는 반성의 늪. 나는 고심 끝에 다음의 방법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혹사시키기. 정신이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그리하여 어느 여름날, 나는 스스로 독방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목적지는 수성동 계곡이었다. 그러나 무기력은 무서웠다. 무기력에 오래 절은 내 몸은, 나오자마자 몸을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고 천근만근 울부짖었다. 집에서 나오려던 마음과 집으로 돌아가려는 마음, 둘 중에 무엇을 더 반성해야 되지? 몸과 을 거슬러 억지로 나아갔다. 무기력은 내 몸에 할당된 중력보다 더 무거운 무게로 나를 짓눌렀다. 중력을 거슬러 억지로 나아갔다. 몇 걸음만으로도 호흡의 규칙이 흐트러지는 뜨거운, 아니 따가운 한낮이었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어야 하는데, 몇 걸음만에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 쓰고 지우고, 지우고 쓰고, 쓰고 쓰고? 또 쓰고. 호흡의 규칙에 기생하고 있던 무기력이 대혼란에 접어든 틈에, 나는 그 모든 것을 거슬러 몇 걸음 더 나아갔다. 앞으로, 뒤로, 앞으로 앞으로, 그렇게 또 앞으로.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가고는 있는가. 나는 미친 것이 틀림없다. 나는 무서움과 무거움과 무더움 속에서, 그렇게 수성동 계곡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착란 속에서, 불볕 속에서, 부디 내 존재가 완전히 타 버리길 고대하면서, 삐그덕삐그덕 거칠 올라갔다. 무엇을 위하여? 반성과 성찰을 멈추기 위하여.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제 그만 내려가자,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다음 순간 조금만 더 올라가자, 하고 생각했다. 내려가자는 생각과 올라가자는 생각, 둘 중에 무엇을 더 반성해야 되지? 생각을 거슬러 나는 계속 나아갔다. 쓰기 위하여, 지우려는 나를 거슬러, 조금이라도 더 쓰기 위하여.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40분이었다. 오늘의 최고 온도는 35도라고 했는데, 지금 체감 온도는 몇 도쯤일까.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맴맴맴맴맴맴맴계곡의 초입에는 쉬땅나무 꽃과 옥잠화와 비비추가 무성했다. 흰 구름과 파란 하늘은 마치 보색처럼 서로를 선명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지독한 여름의 열기가 내 안 구석구석 배어들었다. 나는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많은 이들이 여름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여름, 여름의 낭만을 이해하면 이 지리멸렬한 생각들을 멈출 수 있을까. 여름, 나를 태어나게 한 계절. 나는 결코 여름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여름을 견딜 수 없어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그 여름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태어남과 살아있음, 둘 중에 무엇을 더 반성해야 되지? 내 마음을 괴롭히는 기억들은 잊히기는커녕 구름처럼 하늘처럼, 그리고 여름 더위처럼 선명해지기만 했다. 한 걸음 올라가면 잊고 싶은 기억이 하나씩  나타났다. 끔찍한 더위 속에서, 모든 과거를 참회하듯 걸었다. 그 이상 화창할 수 없는 날이었다.



어느 날, 여름을 좋아하는 A에게 물었다. 너는 여름이 왜 좋아? 여름의 좋은 점 3가지만 알려줘. A는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답했다. '가벼운 옷차림, 땀 흘리며 운동하면 상쾌함, 맥주가 맛있음.' 다른 건 잘 모르겠으나 여름에 유독 맥주가 맛있긴 하다. 나는 세 번째에만 동의할 수 있었다. 결국 아무것도 잊지 못한 채,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땀에 젖은 티셔츠를 벗어던지고 찬물로 샤워를 했다. 그러나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어도 온몸에 스며든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뜨거워. 너무 뜨거워. 나는 지쳤어. 다들 여름이 좋다는데. 나는 잘 모르겠어. 참회와 고독을 그만할래. 뜨거워진 채 절규하듯이 맥주를 마셨다. 벌컥벌컥 울었다. 엉엉 마셨다.


그날 밤, 나는 비로소 긴 휴식에 접어들 수 있었다. 반성의 휴식. 숙면은 이루어졌다. 땀도 글도 해내지 못한 것을 술이 해낸다. 어쨌든 쇼펜하우어는 맞다. 자신이 증오스러울 땐 자는 것이 최고다.



 8월 8일, 오늘은 입추다. 나는 여전히 여름을 이해하지도, 좋아하지도 못한 채로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다. 여름을 좋아하는 A에겐 유감이다. 그러나 처서가 되어도, 백로가 되어도, 이 시대 지구는 규칙을 잊고 무지하게 끓으리라. 그래요, 절기가 다 무슨 소용인가요. 여름이니 뭐니, 우리 맥주나 한잔 해요. 위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