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막 기온이 떨어질 때마다 다시 태어나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매 해 그랬다. 내가 겪었던 뜨거움도 결국 평범함에 불과하구나……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여름은 죽음의 계절이다.내 계절 시계는 봄에 이불을 덮고 여름에 잠든다. 나는 다가올 가을을 위해 아기처럼 순정한 고독을 준비한다. 새 고독으로 새 가을을 노래하며, 이어 사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 살겠노라 다음 생의 기획 의도를 쓴다. 흉흉한 도시와 헐헐한 사회를 소심하게 저주하며 죽고 싶다, 죽이고 싶다, 앙앙거리며 살아온 시간을 뒤로하고, 나는 이제 죽고 싶음과 죽이고 싶음 사이에 존재하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 쓰고 싶다. 여름이라던가, 꽃이라던가, 빛이라던가, 하는.
지난 봄과 여름, 나는 처절한 고독 속에서 몸부림치며 한밤중에도 사무실을 창백하게 밝히던 백색등 대신 저절로 달구어진 하얀 태양을 보았고, 담배 냄새와 미세 먼지가 쩌든 지하실 공기 대신 동네 곳곳의 아까시나무, 조팝나무, 무스카리 향기를 맡았다. 유월의 수레국화를 보며 하나의 꽃은 수많은 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고, 칠월의 도라지꽃을 보며꽃잎들이 꽃별천지 동서남북 종이접기의 귀재라는 것을 눈치챘다. 하며내 얼굴보다 더 크게 피었다가 지는 경이로운 작약의 시간을 지켜보았으며, 한 주먹 크기의 화분에 담겨 있던 해바라기 모종이 내 키보다 더 커졌다가 끝내 까맣게 타 내리는 그 모든 시간을옴 - 헤아리며 살았다. 바야흐로 내게 허락된 순경의 시간이었다.
나는 돌아올 체력을 안배하지 않고 말없이 걸었다. 인간의 말은 없이. *들판의 야생 장미가 향기롭다는 건 말로 안 해도 다 알고 있지 않은가.(*윌리엄 워즈워스) 그리고 내 800원짜리 메모장의 마지막 페이지를 다 채웠다. 그러므로 내 마지막 직업은 메모광이었다. 나는 새 메모장을 꺼내며, 그 숨 막히던 여름의 감각을 얼마나 치열하게 사랑하지 않았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메모 때문이었다. 여름에 대해 너무 많은 메모를 남긴 것이다. 말하지 않음과 말함이 하나의 몸이라는 것을. 사랑하지 않음과 사랑함이 하나의 언어라는 것을. 스스로 불러주고 스스로 받아적었으니. 그게 뭐람. 결국 여름을 부정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던 걸까.
여름 아이는 죽어가고 있다. 어제까지의 시간은 전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또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단한 깨달음처럼 써 놓은 내 전생의 마지막 기억은 고작 편의점 술 코너 어슬렁대기, 듣기 싫은 말 흘려듣기, 나 좋다는 사람으로부터 도망가기, 나 싫다는 사람에게 매달리기, 툭하면 인생 인생 중얼거리기, 지나가는 사람들 이야기 엿듣기, 시 구절 베껴 쓰기, 카페나 술집 검색하기…… 따위였으므로. 평범한 삶 속에서 적당히 괴로워하는 것이 내 꿈이었다면, 오, 모든 것 다 이룬 생일 테지.
헤매듯 산책하던 어느 열대야에 지나가던두 사람의재잘거림을 엿들었다. 야, 사람들은 다 외로워.스쳐 지나는 순간 그 말이 어떻게 다 내 귀에 들어왔을까. 말은 한 자 한 자 선득한 활자가 되어 스스로 메모장에 내려앉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외롬으로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다니…… 그래, 이 많은 사람들의 고독이 다 이해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각자 죽어가는 시간 속에서 홀로 잊어야만 하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이 덜컥 차가워질 어느 가을밤에, 우연히 스쳐 지났던 두 여자처럼 누군가와 함께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나의 고독, 너의 고독, 다 말해질 수 없는 무거운 지구의 고독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