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정화해 주는 것은 언제나 바람이었다. 나는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라는 폴 발레리의 시 구절을 좋아하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라는 이병률의 책 제목을 좋아한다. 나는 '명지바람'이라는 다정한 단어를 좋아하고, 언젠가 부드러운 바람이 불 때 내 곁에 우연히 있을 누군가와 그 단어에 대해 이야기할 날을 기다린다. 나는 바람에 커튼이 찰랑이는 장면을 사랑하고,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따뜻한 녹차를 꺼낸다. 나는 창문 없는 고시원에 살 때 자주 슬퍼했고, 피곤한 점심시간에도 한 줄기 바람을 쐬기 위해 공원을 걷곤 했다.
8월의 첫 번째 태풍이 지나갔다. 태풍은 내 마음을 바다처럼 한 차례 뒤집어놓고 갔다. 지나간다. 나는 이 사실을 또 잊고 있었다.
오후 5시쯤, 태풍이 상륙하고 있었다. 창문을 열자 여름답지 않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그 차가움이 좋아서, 빗방울이 튀어 들어오는 걸 알고도 창문을 열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열기가 꺾일 거라는 기대 때문일까. 느닷없는 충동이 나를 방문한다. 떠날까?
수많은 자동차들이 가까워졌다 멀어져 간다. 허공에는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는 빽빽한 도시 소음, 인공의 아우성 같은, 그러나 그날만큼은 창문을 열고 싶었다. 고독하다. 그러나 이 고독을 멈추고 싶지 않다. 나는 누구에게도 고독을 방해받지 않고, 바람처럼 지나가는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마치 병실에 홀로 남은 환자처럼,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헤아리면서. 떠날 수 있을까?
젊음의 패기로 무언가를 저지르기에는 부담스러운 나이다.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키우고 더러는 이혼을 하고 또 다른 반려자를 찾아 나설 때, 나는 늦깎이 만학도처럼 느리게 꿈꾸며 단칸방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친구들이 자동차를 사고 집을 사고 승진을 할 때, 나는 꿈 많은 소녀처럼 노트를 펼치고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학자금을 다 갚으면 생크림 케이크와 레드 와인을 사서 자축 파티를 해야지.목돈을 모아서 월세방에서 전세방으로 옮겨야지.
나는 만학도인가, 소녀인가. 인생의 길이와 관계없이 언제나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꿈은 전세 사기를 당했을 때 한 번 무너졌고, 구조 조정과 금리 인상을 겪으며 두 번 무너졌고, 사실은 '나'라고 믿고 싶었던 모든 것에 입실과 퇴실을 반복하며 서서히 허물어져 갔다. 태풍의 소식을 듣고 나서야 알았다. 그것은 이미 잔해까지 다 쓸려 나갔음을.
분명한 것은 떠난 뒤에는 반드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떠나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자리로. 부침 많은 인생 편력 덕분에 나는 이 서늘한 진실을 소싯적부터 몸으로 알았다. 오랜 방황 끝에 마지막으로 정착했다고 믿은 회사에서, 나는 휴식만큼 노동도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노동을 함으로써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입고 싶은 옷을 사고, 금전적 어려움 없이 인간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노동을 함으로써 내 능력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고, 사회의 일부에서 작은 필요가 될 수 있었고, 적은 금액이나마 주기적으로 저금할 수 있었다. 잔인한 현실과는 무관하게, 내 노동은 그런 식으로 고귀했다. 나는 떠나지 않고 버티려 했다. 이 회사니 저 회사니, 떠나봤자 여기에서 다시 여기일 것을 알았기에.
또한 지금까지 힘겹게 쌓아 올린 것을 어떻게든 지켜내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애정이라 불리며, 집착이라고도 불리는 그 마음. 내려놓는 마음만큼 지키려는 마음도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달에는 실업 급여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리라 굳게 결심했다. 그러나 어림없었다. 전세 대출 이자와 관리비와 학자금과 각종 요금 세금을 납부하고 나면 식비도 모자랐다. 바짝 독이 오른 나는 식비를 극단적으로 줄였고, 그 달에는 빈혈과 이명, 속쓰림과 에너지 부족에 시달렸다. 아둔하게도 한바탕 지지리 궁상을 떨고 나서야 마음을 고쳐 먹었다. 죽을 땐 죽더라도 살 땐 살고 보자.
이 모든 상념이 맴돌이치는 가운데, 태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흘깃 스쳐 지나지 않겠다는 듯, 한반도를 분명하게 관통하면서. 그런데 거기 당신, 태풍과 싸울 셈인가요?
잠들었다. 상념의 바다 속에서 무언가 끝없이, 끝없이 일렁였다. 나인지 파도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밤인지 낮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가늠되지 않았다. 끝의 끝까지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을 물결에 바람결에 흘려보냈다. 시원했다. 그 차가움이 좋았다.
태풍이 지나갔다. 세상은 고요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러나 나는 하나의 생이 최대의 풍속으로 흘러가는 장면을 분명하게 목격했다. 다음날, 2층의 카페에 앉아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창밖으로 사람들이 끝없이 횡단보도를 오고 갔다. 지나갔다. 그게 하룻밤 사이의 일이든, 하나의 인생에서 일어난 일이든. 지나간다. 그러므로 나는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것이다. 아무것도 나를 붙잡아둘 수 없다. 흘러간 젊음도. 무너진 꿈도, 헐빈한 통장 잔고도.
그러니까, 바람이 불면.
<낙천(樂天)>
김소월
살기에 이러한 세상이라고
맘을 그렇게나 먹어야지.
살기에 이러한 세상이라고,
꽃 지고 잎 진 가지에 바람이 운다.
이번 글은 지나가는 단상들을 약간은 두서없이 기록해 보았습니다. 그나저나 브런치에서 '에세이 크리에이터'라는 배지를 달아주었네요. 감사합니다. 오프라인에서나 온라인에서나 한결같이 소통의 기술이 부족한 탓에 그저 저 편하게 쓰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이런 고민을 하는 이유는 언젠가 뜻과 결이 맞는 작가님과 공동 매거진을 써 보고 싶기 때문이에요) 어쨌거나 어색한 배지를 보면서 계속쓰자는 다짐을 해 보았습니다. 무엇이든, 얼마만큼이든, 주눅 들지 않고 쓰기, '계속' 쓰기. 저에게는 그게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모자란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