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싱한 핑크를 모락모락 피워낸 여름날배롱나무를 지날 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걷던 이에게 말했다. 이 나무 이름 뭐게?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꽃이나 나무, 바람이나 별 이름을 알려주기를 좋아한다. 다소 자기중심적이고 도취적인 태도로.당신은 모른다고 대답한다. 모른다고 대답해 주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태양은 뜨거웠고 땀이 목과 쇄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여름의 절정 속에서 나는 말했다. 기억해, 배롱나무야.
당신은 모른다. 꽃이 피었을 때 배롱나무를 알려줄 수 있어서 내가 속으로 얼마나 놀랐는지를. 내가 최초로 배우고 겪고 가슴속에 새겨 왔던 배롱나무는 꽃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껍질이 벗겨지고 맹숭한 뼈를 드러낸 줄기의 모습이었다. 나는 꽃이나 나무가 자신의 절정을 지났을 때, 그 후를 관찰하기를 좋아한다. 다소 위선적이고 히어로적인 태도로. 나는 꽃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그것을 정의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꽃이 없어도 그것을 알아보기를 원한다. 마른 잎새만으로, 질감만으로, 뼈대만으로, 그것을. 그것의 이름을.
당신은 이름이 없다. 당신은 H이고 E이고 Y다. 당신은 R이고 J이고 C이다. 나에게꽃의 이름을말하게 하는 당신, 도대체 누구신가요?나는 묻는다. 당신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전에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저를 왜 사랑하시나요! 나는 매달린다. 당신은 모른다고 대답한다. 모른다고 대답해 주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당신이 배롱나무를 기억했으면 했다. 당신은 내게 기억하겠다고 맹세한 뒤,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그런 당신의 의중을, 당신의 이름을, 영영 알 수가 없어서, 꽃 이름과 나무 이름을 알려주고 또 알려줄 것이다.
고독을 배제한 채 꽃을, 오직 꽃을 말하며 걸은 순간이 있었다. 이전과 이후를 고려하지 않고 살아낸 그 여름,한 생이 배롱나무 꽃처럼 모락모락 피어났던 순간들. 당신은 나의 고독을 모른다. 나의 고독을 모르는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 당신을 다음 계절에도 만나고 싶어진다. 여름, 그 후를 관찰하고 싶어진다. 그러니까나도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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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https://www.southernliving.com/
*배롱나무는 여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식물 중 하나다. 배롱나무 꽃을 '백일홍' 또는 '목백일홍'이라 부르기도 하며, 햇볕이 작열하는 한여름 내내 꽃을 피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