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화창한 날이었다. 약속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보류되고 있었다. 책을 펼쳤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어두운 날이었다. 불을 켜지 않고 읽었다. 문장을 읽은 건 아니었다. 단어에서 단어로 건너가고 있었다. 내가 읽는 행위를 지켜보았다. 나는 지켜보는 존재다. 나는 책이다. (나는 더 이상 읽을 수 없다.) 나는 오래도록 의자에 앉아 있다가, 점점 의자에 앉아 있는 현상이 되어 간다. 누군가 내게 앉아주기를 기다리는 하나의 형상이 된다. 나는 의자다. (나는 더 이상 앉을 수 없다.) 의자의 시선에서 세상을 본다. 누군가 내게 앉았다 갈 때, 나는 몇몇 장면만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건 장면뿐이다. 문장 속에서 단어만 읽듯, 영상 속에서 사진만 본다. 마치 교통사고처럼 정지된 장면들을 끝없이 반추하고, 회상하고, 숙독하다가, 모두가 약속을 취소하고 떠나갔다는 것도 모른 채,
잔류한다
결락된다
추락한다
.
.
.
감각이 실족된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통제력을 발동시키지 않는다. 그저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간다. 몇 시간은 잠깐 사이에 지나가는데, 몇몇 순간은 끝내 지나가지 않는다. 부서진 기억들이다. 문단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어 본다. 기억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어 본다. 어떻게 고쳐도 흘러가지 않는 순간들이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그것들은 물리적으로 고독하다. 몸으로 사는 일도 마음으로 사는 일 못지않게 위태롭다.
무엇이 아프고 무엇이 아프지 않은 것인지 헷갈리는 날이었다. 몸이 아픈 것인지 마음이 아픈 것인지 모르겠다. 무엇이 무엇을 더 망쳤는 지도 알 수 없다. 최초의 순간에 그 약속이 나에게 보자고 한 건지, 영영 보지 말자고 한 건지 기억할 수 없다. 밝은 날이었고 어두운 날이었고 읽은 날이었고 읽지 않은 날이었다.
다시, 쓰기 시작한다. 그런데 글을 글로서만 대하는 법도 모르겠다. 허구를 쓰지 못한다. 설정을 하지 못한다. 나는 낱낱이 기록되는 존재다. 나는 글이다. 마침내, 글이 나를 쓴다. (나는 더 이상 쓸 수 없다.) 나는 시도 에세이도 소설도 아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고백에 가깝다. 단어로, 사진으로, 그리고 스쳐가는 마음으로…… 그저 그렇게 기록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