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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Sep 21. 2023

발목 없이 걸은 오후

#07


 신발을 신으려 하는데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목이 없었던 순간, 혹시 그런 순간이 있지 않나요?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아무렇게나 길을 걸어 다닐 때가 있잖아요?


 어느 흐린 오후, 목적지 없이 홀로 걷다가 누구에게도 신어지지 않은, 낡은, 비인, 오래된 신발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평생 동안 무언가를 따라다녔다는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발목도 없이 걸었던 거구나, 싶어서는, 느닷없이 눈물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어깨에 힘을 주어야만 했어요.


 오가는 사람들의 신발을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가는 똑똑한 신발, 씩씩한 신발, 바쁜 신발, 춤추는 신발……들이 있더군요. 그런데 내 신발은 어디에? 혹시 저 중에 내 것이 있지는 않을까? 나는 발목 아래를 도둑맞은 게 아닐까? 슬퍼졌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신발은 분명 자취방 현관에 가지런히 놓여있을 테고, 저는 너무 오랫동안 먼 곳을 여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알 수 없었던, 그래서 아무 방향으로나 걸었던 모든 순간에, 저는 발목 없이 오로지 마음만으로 무언가를 아다녔다는 것을요.


 단언컨대 저는 결코 이 막다른 골목에 오려고 한 적이 없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곳에서 주인 없는 신발을 마주했고, 제가 발목 없이 걷는 유령 같은 존재라는 망망한 현실을 마주한 것이죠. 당황스러웠습니다. 아아, 그렇다면 저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슬픔 없이 한 걸음 더 걸을 수 있을까요. 어떤 기억과는 영영 이별할 수가 없어서, 저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슬픔을 멈추지 못했기에, 저는 계속해서 여행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신발 속에는 흙이 있었고, 뿌리가 있었고, 싹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너무 오래 방치되었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저는 외면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기 저 멀리, 희미해져 가는, 떠나가는 무언가를 붙잡아야만 했습니다. 기다려 줘요! 저를 두고 가지 마세요! 저는 급하게 그것을 따라갔습니다. 헐벗은 채 뛰어갔습니다. 그 순간 저는, 저를 스쳐갔던 모든 예감의 생생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윽고 땅거미가 내렸고, 다시, 저는 발목 없이 걸어야 했습니다.


  오후의 일은 꿈이었을까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저는 울었던가요, 안 울었던가요. 모르겠어요. 다 희미해졌어요. 저는 계속해서 여행했을 뿐이고요, 왠지 신발을 신지 않은 것처럼 발이 불편했을뿐예요. 그러나  익숙해졌습니다. 늘 그랬던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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