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초고

소설적 인간과 에세이적 인간

#일기

by 세라

날마다 하루종일 단어 한 두 개를 반복적으로 생각한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오늘의 단어는 '신변 정리'였다. 낮에 당근 마켓에 네스프레소 커피 머신을 팔고 그 돈으로 마트에 식재료를 사러 가는 길이었다. 같이 호되게 전세 사기를 당한 뒤 각자 찢어져서 들어간 전셋집에서 폭포처럼 치솟은 이자를 감당하고 있는 친구와 나는, 신변 정리를 하자는 농담을 자주 한다.


"우리처럼 혼자 사는 애들은 어쩌다 죽어도 한참 뒤에 발견될 텐데, 나중에 친구나 가족이 정리하러 왔다가 이 난잡한 자취방을 보면 그거 얼마나 쪽팔리는 일이냐."


"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우리 그나마 제정신일 때 박스 한 두 개로 짐 줄여놓자."


커피 머신을 팔고 신변 정리에 진도를 나갔다는 내 소식에 친구는 부러워했다. 나는 라떼 한 잔을, 오트밀 밀크로 옵션을 변경해서 500원을 추가하고 샀다. 친구가 말했다. 참 취향도 고급스럽네. 그러니까 말야. 큭큭.


달리는 버스 안으로 햇빛이 비스듬히 비쳐 들어왔다. 햇빛이, 가을 오후의 그것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햇빛이었다. 오후의 오트밀 밀크 같은 햇빛이었다. 가난한 자만 알아차릴 수 있는 추가적인 특별함이 있는 햇빛이었다. 창밖에는 도로 관리 차량에서 내린 남자들이 삽을 들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힘이 느껴졌다. 거리에는 무료 성경 공부를 선전하는 이들이 양복을 입고 서 있었다. 거기에는 멀끔한 친절도 함께 서 있었다. 한때 같이 일했던 성실한 협력 업체 직원과 무척 닮은 사람이 씩씩하게 걸어갔다. 기시감 때문에, 아니 사실은 걸음걸이가 너무 씩씩해서, 그 사람의 뒷모습을 몰래 조금 더 봤다.


이렇게 사람 사는 세상을 받아 쓰고 있자면 소설을 쓰는 기분이 든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세상을 면밀하게 관찰할 줄 아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렇게 다시 내 안으로 침잠할 때면, 모든 글은 에세이로 변모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쓴 풍경에 큼큼한 고독이 스며든다. 나는 왜 소설을 쓰지 못하는가, 글 쓰는 내내 그런 생각을 자주 했었다. 일단 나는 나만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그렇다. 어디에 속해 있든 나만의 세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늘 속으로는 딴생각 중이다. 그렇게 바깥의 디테일을 놓친다. 나에게 함몰된다. 결국 '나'라는 화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화자를 내가 아닌 가상의 인물로 설정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 거기에 은근슬쩍 내 이야기를 섞어 놓으면 된다고 하는데, 나는 기어이 100%를 고백하고 만다. 진실인 듯 허구인 듯 기예를 부리는 것을 하지 못한다. 어디에든 마음을 다 쏟아버리는 건 좋지 않은데, 그게 안 된다. 고백하자면 내가 살면서 스스로를 위기에 빠뜨리는 방식과 비슷하다. (또 고백했다.) 물론 나도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남발하는 에세이를 접했을 때 거부감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사실은 '나는'이라는 주어를 자주 생략하는 편이다. (또 고백했다!)


무엇보다 나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지 못한다. 캐릭터와, 캐릭터 간의 관계와, 구조적인 메타포까지, 아무 문장이나 툭 던져 놓고 보는 내 글쓰기 버릇상 그렇게 일관된 구조 속에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렇게 신변 정리 얘기를 하다가 오후의 풍경 얘기를 하다가 문학 이야기를 해 놓고 정리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나는 너무 거칠고 변덕스럽다. 이리 튀고 저리 튀는 감정을 고백하는 데 있어서는 최소한의 설정조차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인지 아무래도 소설이라는 장르가 좀 더 깎고 다듬은 쪽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기는 한다. 반대로 에세이는 문학을 한다는 느낌보다는, 날것의 삶 자체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소설이 녹화 방송이라면 에세이는 라이브 방송인 것이다.


한편 내가 가장 동경하고 꿈꾸는 장르는 시다. 나는 시와 에세이는 자매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소설가의 에세이보다 시인의 에세이가 더 많은 것처럼. 시와 에세이의 공통점은 고백 덩어리라는 점이다. 에세이는 고백의 산문이고 시는 고백의 운문이다. 에세이는 시작 노트이고 시는 압축된 에세이다. (시와 에세이의 차이에 대해서도 의견이 있지만 그건 다른 기회에 쓰기로 한다.)


또한 시와 에세이는 둘 다 (일반적으로) 캐릭터나 내러티브보다는 '순간적인 느낌'에 집중하는 장르다. 나는 그 점에서 어느 정도 내 우유부단한 성격과 미련스러운 인성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나는 장면을 흐르게 하는 것보다는 장면을 멈추게 하는 것에 더 몰두하는 편이다. 몰두하는 정도가 아니라, 휘몰아치는 특정한 느낌과 이미지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그런 식으로 자주 교착 상태에 빠진다. 말하자면 글쓰기의 순간 속에서 나는 만성적인 열병을 앓고 있는 상태다.


위의 맥락에 이어서 나는, 고백하자면, 내 순간적인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형용사나 부사를 마음대로 만들어내서 쓸 때가 꽤 자주 있다. 그래서 맞춤법 검사에서 고치라고 떠도 무시하고 넘어갔던 적이 많다. 그 무엇도 느낌을 구속할 수 없으므로, 구속되지 않는 것이 느낌의 본질이므로, 느낌에 대한 표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게 제 아무리 맞춤법이라도 말이다. 백 번 양보해도 '언어로 호환되지 않는 느낌'이 훨씬 더 많다. 내가 시를 동경하는 것은 이 모든 '제멋대로'가 최소한 허용되는 장르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가와 시인, 누가 더 말이 많을까? 누가 더 재담꾼일까? 나는 전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또한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소설 한 편에 담긴 활자의 양과 시 한 편에 담긴 활자의 양, 나는 그것이 실제 발화양으로도 연결된다고 믿는 편이다. 그러니까 이는 내가 여전히, 글 속의 작가와 글 밖의 작가를 분리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실은 내가 호환성이 떨어지는 인간이라는 점도 자수해야겠다. 또 고백이다. 또 에세이로 돌아온다.


나는 종종 소설을 쓰는 주변 사람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그들의 절제된 자아와 세련된 기예를 보면, 아무리 지망생이라 해도 조야한 일기 묶음 따위가 아니라 일단 문학에 속했다. 하나의 세계가 <제목>이라는 분명한 괄호 안에 갈무리되는 것도 뭔가 어른스러워 보였다. 나의 제목은 언제나 뭉뚱그려진 (제목)이었다. 이 얘기에서 저 얘기로,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맞춤법 속에서 명명할 수 없는 특정한 느낌처럼. 내가 너무 '나'라는 인간에만 갇혀 있어서 세상에 대한 전체적인 시야를 가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내 과도한 자아 노출이 한없이 부끄러워지곤 한다. '나는'이라는 표현을 자제하는 것은 부끄러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에세이를, 즉 '나'를 쓴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만 가진 것은 아니다. 나는 에세이를 사랑한다. 나의 바닥을 파고듦으로써 상대방의 깊은 내면에 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 에세이에 대한 긍정적인 통찰은 아래 정여울 작가님의 문장으로 갈음하고 싶다.


"시인에게는 단 몇 줄의 문장만으로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결정적 장면을 포착해 낼 수 있는 언어의 연금술이 필요하지요. 소설가에게는 이야기를 통해 끝내 진실로 가닿을 수 있다는 믿음과 엄청난 끈기, 캐릭터와 스토리를 조각해 낼 수 있는 관찰력과 상상력, ‘이런 이야기가 사랑받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싸울 수 있는 대담함이 필요하고요. 칼럼니스트에게는 그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글감을 찾아내는 뛰어난 순발력과 현실 세계에 늘 깊이 발을 들여놓는 참여정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에세이스트는 이 모든 걸 갖춰야 하지요. 시인의 언어적 감각, 소설가의 스토리텔링, 칼럼니스트의 순발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 아우를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해요."

-정여울, <끝까지 쓰는 용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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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버스를 타고 마트로 가는 동안 한 생각이다. 커피 머신을 판 돈으로 사과 대추를 샀다. 친구에게 말해준다면 참 취향도 고급스럽네, 라고 하겠지. 배가 불렀네 불렀어, 라고 안 하는 게 어디인가. 신변 정리를 하겠다면서 오트밀 밀크 카페 라떼와 사과 대추를 사 먹은 오후였다. 좋은 당근 거래였다. 별 5개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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