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ebla#9
Puebla에서 가장 가깝게 지냈던 친구 Suhai는 헤어짐을 앞두고 내게 일러스트와 함께 편지를 써 주었다. 나란히 앉아 산과 구름을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을 그리고, 그 아래에 이런 문구를 썼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친구가 널 기다리고 있어
그녀는 말한다. 나를 통해 독립심, 용기, 진실한 우정을 배우게 되었다고.
그녀가 나의 모험심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그녀에게서 따뜻한 인간애와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보았다.
수는 우리가 까페에 들어가서 편지 교환을 하기 전에 미리 깜짝 선물을 준비해 와서 나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녀가 선물해 준 것은 '어린 왕자' 스페인어 버전 책이었다. 내가 소설책을 읽으며 공부를 해 왔다는 것을 아는 수의 센스 있는 선물이었다. 나도 그녀에게 스페인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편지를 써 주었다. 언젠가 꼭 한국에 놀러 오라고, 할머니가 되어서 와도 기억하겠다는 내용이었는데, 한국어 부분은 수가 스스로 더 공부해서 해석해보고 싶다고 해서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의 독학 한국어를 응원한다!
나는 함께한 날동안 찍은 사진들을 미니 포토 프린터기로 인화해서 선물해 주었다. 내 포토 프린터는 1세대의 올드한 모델이지만, 그래도 중남미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에게 이걸로 즉석 사진을 인화해서 선물했고,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너무 좋았다.
책갈피 같은 우리의 사진들을 하나하나 넘겨 보면서 수는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작은 선물에도 감동하는 그녀, 때문에 나도 울컥했다.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낳듯, 그녀는 언제나 내게 또 다른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코스타리카, 아르헨티나, 멕시코
쏘깔로 바로 근처에서 며칠 묵고 싶어서 며칠 동안 수의 집에 가지 않고 호스텔에 묵었다. 묵는 동안 세 명의 남자를 알게 되었다. 호스텔로 돌아와서 떠날 채비를 하고 그들과도 마지막 인사를 했다.
1. 같은 방을 썼던 코스타리카 청년
-분명 여자 전용 도미토리를 신청했는데, 호스텔 직원의 실수로 혼합 도미토리로 배정됐다. 이틀째까진 여자밖에 없어서 몰랐는데 3일째 샤워하고 나왔을 때 방 안에서 뽀글 머리의 청년을 보고 기겁해서 소리를 질렀다. 이후 그 죄 없는 내 윗층 침대 남자에게 머쓱해졌고.
-그날 밤 테라스에 나와 사진 정리를 하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한 무리가 놀고 있었다. 그중에 이 코스타리카 남자가 있었고, 나에게 유쾌하게 맥주를 권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원래 직원이 여자만 있는 방이라고 말했었다고 설명했고, 그와의 오해를 풀었다.
-그는 맥주를 마시면서 자기 친구들이 있는 자리에서 흥분해서(?) 말했다. 내 슬리퍼가 "Super CUTE" 하다고! 슬리퍼는 떠나기 전 친구가 카카오프렌즈샵에서 선물해준 라이언 캐릭터 슬리퍼였는데 내가 보기에도 사실 슈퍼 큐트하긴 했다. 그런데 그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코스타리카 남자가 친구들에게 아주 신나서 해맑게 설명하는 걸 보고 빵 터짐. 카카오캐릭터들 중남미에 진출 안 하고 뭐하나..?
2. 그의 친구, 아르헨티나 청년
-그의 친구들은 다국적이었고 그중 아르헨티나 사람이 있었다. "아르헨티나 남자는 청소부마저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던 나는, 그에게 팩트 체크(?)를 요구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적어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맞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흠, 꼭 가봐야겠는걸?)
-그는 나에게 BlablaCar라는 어플을 추천해 주었다. 출발지와 목적지가 같을 때 자동차를 셰어하는 어플이었는데, 배낭여행자들이 굉장히 많이 쓴다고 했다. 여행을 하며 만난 친구들이 이런 셰어 플랫폼들을 많이 추천해 주었는데 그들은 모두 정말 좋다고 극찬했다. 여행자는 저렴하고 편하게 이동하고, 운전자도 역시 어차피 같은 방향으로 가는 김에 겸사겸사 용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3. 테라스에서 친구가 된 멕시코 청년, 이반
-테라스에서 인터넷 속도가 제일 빨라서 밤마다 나와 있었다. 어느 날 12시가 넘는 시간까지 혼자 남아 있었는데, 한 멕시코 청년이 테라스로 나왔다. 새벽에 귀신같이 앉아 혼자 테라스를 지키던 나에게 그는 말을 걸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Puebla 대학교 견학을 왔다가 호스텔에서 묵게 되었는데, 친구들이 늦게까지 시끄럽게 놀아서 잠시 쉬고 싶어서 나온 거라고 했다. 그날 밤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이름은 이반(Ivan)이었는데 나에게 생활 스페인어(?)도 몇 개 가르쳐 주었다.
¿Qué onda?
¿Qué rollo?
¿Qué transita por tus venas?
전부 그냥 What's up? What happen? 과 비슷한 뜻인데, 친구들 사이에서 쓰는 가벼운 슬랭 같은 것이라 했고 멕시코에서만 통하는 말이었다. 특히 3번째에 venas는 정맥인데 직역하면 "네 정맥에 무엇이 돌아다니고 있니?(?????)"여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었다. 투철한 실험정신(?)으로 나중에 다른 친구에게 써 봤을 때 그 친구가 어디서 배웠냐며 엄청 웃었다. 어른들한테는 쓰지 말라고 덧붙였다. 호기심에 나중에 다른 친구에게 한번 더 써 봤는데 그 친구도 깔깔 웃었다. 살아는 있냐? 숨은 쉬고 있냐? ..이런 느낌이었을까? 여전히 모르겠다.
-비록 이반과는 하루밖에 못 봤지만, 그는 나중에까지 연락을 하게 된 친구 중 한 명이다. 언젠가 그의 집이 있는 베라크루즈에 놀러 가기로 약속했다.
Puebla에서 Taxco로 가는 교통편이 마땅치 않았다. 예전에는 터미널에서 주말마다 바로 가는 버스를 운영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했다. 멕시코시티의 남부터미널로 돌아 돌아 가야 하는 길이라, Taxco를 생략할까 고민도 했는데 전날 소개받은 blablaCar에 운 좋게 딱 그날 적당한 시간에 출발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셰어를 신청해서 저녁 6시에 출발하는 걸로 약속을 잡았다. 사전에 짐이 좀 큰데 괜찮냐고 미리 양해를 구했고, 그들은 굉장히 친절했다.
약속 시간은 오후 6시, 미리 짐을 가지고 약속 장소로 갔다. 그런데 떠날 때 즈음 되니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Puebla가 울고 있어
비는 그칠 생각을 않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억수같이 내렸다. 수가 마지막 약속 장소까지 함께 가 주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약속한 사람이 오지 않는 것이었다. 약속을 확실히 하기 위해 당일 2시까지 여러 번 확인 메시지를 교환했는데도 말이다.
결국 수에게 부탁해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그들은... "일정을 취소했다"고 했다. "비가 많이 와서 안 가기로 했다"고.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정말 황당했다. 그럼 미리 전화를 해 줬어야지. 이 장대비 속에서 짐들을 들고 기다린 나는 어쩌라고..?
그들은 30분 전에 그 사이트에서 메시지를 보냈다고 했는데, 전화나 문자도 아니고, 이미 약속 장소에 나와 있는데 접속해볼 리 만무했다. 나는 그들에게 화를 내고 싶었지만 친절한 수는 "걱정 마세요, 세뇨르"라고 하며 전화를 마무리해 버렸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수가 함께 와 주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것. 인적 드문 거리의 밤에 빗속에서 갈 곳도 없이 혼자 남겨졌더라면.. 상상도 하기 싫다. 그녀는 나 대신 통화를 하며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다행히 Taxco 숙소의 예약도 페널티 없이 바꿀 수 있었고, 그날 밤은 그녀의 집에 다시 한번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런 긴급 상황에선 현지인 친구가 정말 큰 도움이 된다.
처음에는 계속 황당했지만 갈수록 헛웃음이 나왔다. 그들이 정말 괘씸했지만 나는 어쨌든 Puebla에서 하루의 시간을 더 갖게 되었고, 이미 여러 번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했던 우리에게는 또 하루가 허락되었다.
오늘 밤에 맥주 한잔 할래?
갑자기 정신줄을 놓은(?) 나는 수에게 제안했고, 수도 좋다고 했다. 그녀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다 같이 동네에 있는 작은 바에 갔다.
나중에는 그녀의 언니도 퇴근하는 대로 합류했다. 마지막 밤을 기념하며 사진도 찍고 이야기도 나누고, 덤으로 독특한 가라오케 문화도 경험했다. 노래방에 익숙했던 나는 이곳 가라오케의 정체도 모르고 분위기에 따라 노래를 신청했다가, 바의 중앙에 서서 노래하며 데뷔전(?)도 치렀다. 어쩔 수 없이 노래를 불렀지만, 반응이 너무나 폭발적이어서(?) 나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우연히 얻은 하룻밤, 수와 그 가족들과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을 만들었지만, 이날 이후로 Blablacar 및 이런 종류의 어플들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처음 Puebla에 대해 글을 쓸 때 '나를 놓아주지 않는 도시'라고 썼다. 아마도 이런 긴긴 이별 과정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Puebla는 자꾸만 나를 붙잡았고, 이별의 여정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여행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진짜, 이 도시를 떠난다.
다음 날 아침, 수는 마지막까지 또 한 번 버스 터미널에 데려다주었다. 이젠 진짜 익숙해서 터미널까지 혼자 택시타고 가겠다고 했는데, 수도, 수의 엄마도 마지막까지 옆에서 배웅해 주었다.
언제 어디에서나 우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수의 말은 길 위에 올라서는 나에게 용기를 준다. 이제,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떠난다. ㅡ언제든 어디에서든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를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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