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에 든 건 시 몇 구절뿐인지라, 눈길을 걷다가 천상병 시인이 생각나버렸다. 나도 날개를 달고 가고 싶었다. 어디로 가고 싶은지는 딱히 모르겠으나, 어디로든지 가고 싶었다. 나에게 왔다가 떠나간 모든 마음이, 저렇게 빛나는 은빛 날개를 달고 왔다 간 것 같았다. 시인이 어떤 계절 속에서 날개를 떠올렸는지는 모른다마는, 그 못지않게 가난한 이 파리한 2023년의 겨울에, 나도 그만 '날개'를 떠올리고 만 것이다…….
기어이 겨울이 되돌아오기까지, 여즉 속세속사 등지고 계획 없이 사는 나를 챙겨주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사교에 있어 아주 불량한 인간이지만, 애정 어린 부름을 받을라 치면 또 탁주 몇 사바리 추억을 기대하며 날름 밖으로 나간다. 이제사 애매허게 나이 먹구 내 남은 건 어리광과 투덜거림 뿐인데, 에라 모르겄다, 까짓것 나마 탈탈 털어 호주머니에 말아 넣고 호로롱 사랑의 잔소리를 들으러 나간다.
후우우…… 추위는 우수같이 내리는데……
또 하루 어찌해 보겠다고 허름한 내 얘기나 떠들러 가는 것이냐…… 잘한 것도 없고 예쁜 것도 없는 것이.
그래도 나는 걸어갔다. 선득한 추위 속에서 뼈째로 나박나박 걸어가는 것 같았다. 숨을 내쉬면 입김이 뼛가루처럼 부옇게 실려 나왔다. 내게 외양이랄 것이 남아 있었던가…… 한숨. 한 걸음. 다만 그뿐. 다만 가는 것이다.
친한 언니네에 초대받아 갔다. 20대 때 방송국에서 만나 쭉 가깝게 지낸 덕에 나는 언니 남편과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을 만큼 친해졌고, 알토란 같은 두 아가들과도 어설프게나마 놀아준다. 그날은 어찌 된 일인지 체력마저 심이 없어 내 주량의 반의 반도 먹지 않았는데 기억을 잃을 만큼 취해버렸다. 나는 취해서 미안하다며 스무 살마냥 펑펑 울어재끼고는, 고집을 부리며 딱딱한 바닥에 새우처럼 누워 지 외투를 덮고 불쌍하게 잠들었다고 한다. 이토록 유해한 이모에게, 착한 부부는 늘 그랬듯 뜨신 쌀밥도 지어주고 해장국도 끓여주었다. 아, 어쩌자고 나는, 이 천사 같은 사랑을 선불로 누리나. 내같이 가난한 놈*이 이래도 되나.
다섯 살 아가가 수줍은 듯 다가와 나를 살포시 안아주었을 때, 내보고 가지 말라며 지네 현관을 작은 팔 꽈악 펼치며 앙증맞게 가로막았을 때, 나는 문득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가시기 전 부쩍 눈물이 많아지시던 우리 할아버지. 무뚝뚝한 딸들이 장난치듯 사랑해요, 라고 현관에서 말했을 때 아가처럼 그렁그렁해지던 그 오래된 눈가. 거기에도 남몰래 천사가 왔다 간 게지. 우리 할아버지, 내 나중에 다섯 살 아가처럼 다가가서 안아드릴게요. 내게 아빠는 없지만 할아버지만큼은 최고였어요…….
어느 봄날에 사붓이 생의 한 켜 넘어가신 내 할아버지는, 내가 만들던 TV프로그램을 챙겨 봐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인기 없는 새벽 타임에 이태리 피자에 대해 별 내용 없는 몇십 초짜리 단신이 나가도 다음날 되어, "할아버지 그거 보고 피자 묵고 싶더라" 하고 전화를 해주시는 분이셨다. 나는 할아버지와 시골 번화가에서 단둘이 만나 국밥을 사 먹은 적도 있다. 할아버지는 찢어진 지갑을 유리 테이프로 붙이고 다니는 분이셨다. 할아버지, 저는 서울 거지예요, 하면 할아버지는, 내는 마산 거지다! 하고 화통하게 답하시며, 서로 배를 붙잡고 껄껄 웃던, 60년 가까이 차이 나는 우리는, 참으로 밝고 무람없는 사이였다.
내 할아버지는 정신보다 육체가 먼저 쇠진한 분이셨다. 사경을 넘기다 깨어나셔서 육성을 쓰지 못할 때조차 정신이 너무나 맑고 온전하셔서, 내 갤럭시 노트에 "OOO신문 1부 갖다 줄 수 있어?"(당시 내가 다니던 신문사) 하고 전자펜으로 집주소를 번지수까지 정확히 써 주시던, 1932-2019년을 명명히 살다 간 당신이셨다. 다행히 내 그때는 백수가 아니었고, 신문 부고란에 할아버지의 이름 석 자가 떡 실렸더랬다.
그런 우리 할아버지, 마지막 숨이 와르르 무너지고 나서 이틀 만에 여여히 가루가 되셨지…….
모두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왔을 때, 세상에는 은빛 깃털이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천사의 날개일까. 참으로 많고, 먼지 같고, 반짝거리는…… 뼛가루 같은…… 아, 날개!…….
날개를 달고 왔나 봐요. 이렇게 춥고 막막한 세상에 또 아가가 왔대요…… 아가가 예쁘지도 않은 나를 안아줬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날개를 달고 가셨어요?…….
나도 날개를 달고 가고 싶었다. 어디로든지 가고 싶었다. 어디든지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폴나폴 날아가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눈길을 걸으며, 나는 온전히 슬퍼하기 위해 슬퍼했으며, 다시 사랑하기 위해 그리워했다. 대단한 생의 의지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이다음으로 만날 사람을, 아가 바라보듯 자애로운 마음으로 대해주고 싶었다. 그리운 마음으로, 한숨 한숨 끝까지 다해…… 다만 그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