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ebla#4 가방 속에 몰래 담아온 것은
어느 날 아침,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그것.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그동안의 인생에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그것.
나의 여정 중에 그야말로 숨어 있던 복병(病)이 있었으니. 길거리 음식도 서슴없이 집어먹고 잘만 돌아다니던 나에게 찾아온 첫 번째 시련은 엉뚱하게도.. 어깨 담이었다.
빠듯한 일정은 아니었지만, 무거운 짐과 가방을 계속 들고 돌아다녔던 것이 화근이었다. 이게 이렇게 큰 고통이었을 줄이야! 예방접종이며 여행자보험이며 하는 것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완벽한 사각지대에 잠복해 있던 녀석이었다. 더구나 감기에 대해서만큼은 극강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나에게 일생일대의 모욕감(?)을 안겨준 녀석이었다.
처음에 근육통은 별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는 오른 팔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엄청난 고통이 따라왔다. 장기간으로 쉬지는 못하다 보니, 도무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멕시코시티에서 뿌에블라로 돌아가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아마도 이 예상 밖의 복병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래 머무른 도시는 고향이 된다
친구들과 친구의 가족들이 있는 이곳으로 돌아온 것은, 연어들의 귀향만큼이나 본능적인 것이었다. 몸이 아프니 욕심도 미련도 뚝 떨어졌다. 멕시코시티에서의 마지막 밤, 갑작스럽게 뿌에블라의 친구에게 '내일 다시 돌아가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거짓말처럼 자주 만나던 쏘깔로 광장에서 다시 만났다.
마음만 먹으면 바로 다음 날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는 게 꿈만 같았다. 그것은 내가 내린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였다. Puebla로 돌아가는 길 내내 고향 가는 마음이었다. 그리움과 설렘, 몽글몽글함, 또 한구석의 알싸한 무엇. 아마도 만남의 대전제는 이별이기 때문이리라.
수는 여느 때처럼 따뜻한 포옹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그런데 재회의 순간, 나도 모르게 참고 있던 것들이 눈물로 터져 나왔다. 어쩌면 혼자 끙끙 앓았던 시간 속에서 내 안의 아이는 울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나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멕시코시티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녀는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사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 진정 기약 없는 헤어짐 뒤의 귀한 만남이었다.
이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수와 함께 까페에서 달콤한 디저트를 시켜놓고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저녁때는 그녀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으레 보내곤 했던 밤을 보냈다. 그녀의 편안한 미소는 감상에 잠겼던 나에게 다시 활력을 주었다.
돌아온 수의 집에서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의 엄마는 내가 멕시코시티에서 길을 잃었던 이야기를 듣고서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멕시코시티? 거기 별로 안 좋아해
복잡한 멕시코시티는 질색이라며 내편을 들어주는 수의 엄마. 괜히 나도 뿌에블라의 토박이라도 대변하는 것처럼 맞장구를 쳤다. 밤이 되자 '기'를 공부하는 수의 언니가 퇴근을 하고 왔다. 그리고 나에게 그동안 배웠던 전신 마사지를 해 주었는데, 손길 하나하나에 어찌나 정성이 담겨 있던지, 나는 마치 신성한 의식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마사지를 하는 동안 릴렉스한 음악을 틀고 다른 가족들도 조용히 지켜봐 주었다.
수의 또 다른 언니는 다른 도시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가족들이 모두 건강이나 치료 쪽으로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물론 마사지를 받는다고 단번에 근육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아낌없는 그들의 사랑은 마음속에 단단히 뭉쳐 있던 여독마저 스르르 풀어놓았다.
마음속에서 이미 고향이 된 도시에서, 보고 싶었던 친구를 만났다. 여행은 생각지도 못한 시련을 주고,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준다. 수많은 우연한 계기들과 갈림길 속에서 사람들에게 신세 지고 부비며ㅡ 때로 지친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나의 힘과 의지가 아닌, 사람들의 도움과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의 사랑을 한 움큼, 슬쩍 가방 속에 집어넣는다. 필요할 때 언제든 꺼내 쓸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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