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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Apr 26. 2024

고독이 고독사하지 않도록

바쁨은 이미 시작되었다. 채용 신체검사를 하고, 고장 난(?) 몸 몇 군데를 고치고(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랬는데),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동시에 알바와 프리 건 처리… 시집을 한 권 사서 카페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광기가 싹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때 맞춰 위벽이 쓰라리고 구역감이 올라오는 평범한 피로가 다시금 음침하게 번지고 있다.(아침 일찍 상쾌하게 눈 뜬다는 기분은 대체 뭘까) 어쩔 거나. 눈 몇 번 감았다 뜨니 고독사 위기에서 과로사 위기로 땡 바뀐 짬뽕맛 인생. 이제 햇빛이 드는 평일 낮에 숲 속에서 나른한 우울에 잠기거나, 모두가 잠든 새벽에 홀로 술에 취해 절망할 자유도 없을 것이다.


평일 오후로서는 마지막으로, 숲으로 갔다. 나는 파계승처럼 참담한 심정으로 고독의 숲을 향해 절을 올렸다. 작년 봄날, 실업 직후 긴 고독의 안거에 들었던 바로 그때 보았던 꽃들이 여전히 한들한들 피어 있었다. 언제나 여기에 있어왔다는 듯이. 시간이 없다,라는 말은 얼마나 허구한가. 시간이 있다,라는 말도 얼마나 허구한가. 시간이 있는 동안에 나는 시간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으며, 시간이 없는 동안에 나는 시간이 흘러가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았는가. 마치 시간이 사물이라도 는 것처럼. 지나간 시간을 되찾아본 자, 있는가?


어느덧 기억의 오솔길에는 모든 계절이 열매처럼 열려 있어서 나는 능금나무를 지나 백일홍을 지나 아카시아를 지나 꽃무릇을 지나 계수나무 아래를, 온 계절을, 만건곤-하게 걸었다. 작약의 봉오리가 차 오르고 있었다. 오월의 작약, 네가 어렸을 적에 나는 꿈을 꾸었단다. 의 모든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고. 월출하듯 꽃을 피우며 수정 같은 물방울들을 떨쳐내던 너의 그 싱그러움, 매일 그 앞에 서서, 기도가 무엇인지 배우고 싶다고 기도했다고. 낙화하는 철쭉, 오월의 나는 썼었단다. 너의 그 가느다란 꽃대가 차라리 내 발목이기를. 연약하게 흔들리는 모든 산형화서들을 이미 부서진 나 하나로 대신해서 부서지고 싶었음을.


꽃들이 아무 대답 없이 나를 떠날 때 나는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고, 그것을 다만 고독이라고 썼다. 그러면 고독에 대해 조금 알 것도 같았고, 다시 모를 것도 같았다. 고독의 화원에 너무 오래 머물렀기에 나는 내가 조금 미친 것을 안다. 이곳에서 나는 삿됨 없이 미치고 싶었다. 그러나 보아라, 가난 없는 고독을 향해 뒤돌아서는 나의 위선을. 꽃이여, 나를 기다려 줄텐가. 기다려달라는 요청을 가지가지 비겁하게 매달아 두고서 나는, 다시 인간의 말을 할 거라고. 시장에 내 존재를 팔러 간다고. 그래야만 살 수 있다고. 너희들은 남아서 이야기할까. 너희들을 받아 적던 존재가 떠나갔다고. 돌아오지 않는 자는 죽은 자라고. 그 애, 갔어. 라고.


여기, 고독했던 한 生을 두고 간다. 오직 고독만이 고독을 사용했던 완벽한 시절. 맹목적으로 우울했고 게으르게 글을 쓰던 날들. 고독이 고독사하지 않도록 언젠가 돌아오고 싶다. 내 고독의 숲으로. 내 고독의 바다로. 뒤돌아보면 죽는다는 오랜 경고에 몸서리치면서도 오월의 작약,


뒤돌아 서름서름 보고 싶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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