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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Apr 03. 2024

째깍, 째깍, 사월.

째깍. 깍. 12시. 


4월 1일. 펄-럭. 깎아지른 절벽 앞, 새 달력님 태연하게 입장하십니다. 사월아, 오너라. 끝장을 보자. 내가 죽든 네가 죽든, 여기서 우리 마지막을 걸고 드잡이판을 벌려보는 거다.


칼날 같은 만년필을 뽑아 들고 백지 앞에 앉았다. 좋은 글 쓰시라고 선물 받은 만년필, 그러나 내가 쓰는 것은 문학이 아니었다. 펜촉보다는 칼날에 가까운 그것. 문학을 꿈꾸는 자들 아래에, 문학을 꿈꾸기를 꿈꾸는 자들이 있다. 내 일기는 한 알의 사과가 아니며 한 잔의 커피도 아니며 한 철의 벚꽃도 아니다. 나는 칼날을 세우고 사과를, 커피를, 벚꽃을, 낭만의 표면 장막을,


찢.었.다.


삶. 아니, 생활이라 부르자. 


사월 안에 일을 하든 뭘 하든 사람 구실 못하면 나여, 다음은 없다. 다음이 없으면 나여, 자질구레  버리고 이사고 뭐고 낭인이 되는 거다. 생활도 아니, 구걸이라 쓰는 거다. 여기서 더 꼬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하, 절벽의 사월이여!




째깍. 깍. 12시.

 

4월 1일. 펄-럭. 담장 너머 빨래가 바람에 나부낀다. 칼날을 품고 산을 오른다. 흙과 돌을 밟는다. 도시를 굽어보는 숲 속 언덕. 불필요한 생각들은 체중의 증가로 이어진다. 생각들이 '물질적인' 무게를 차지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몸을 일으키기조차 힘들 수가 있나. 나는 체중 관리 위해 종이 위에 생각들을 써 내려갔다. 서걱서걱. 만년필의 집도로 생각 덩어리들을 떼어낸다. 포르르. 새님들 시야 속에 입장했다 퇴장하시고. 왱왱. 벌님들 자꾸만 나를 깨우시는데. 아, 당신들 지금,  


나를 부르는 것이오?


문득 풍경을 바라본다. 새, 벌, 나무, 바람…… 내 존재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물질들, 형체들. 그때 기둥 뒤로 고양이가 빼꼼, 정확하게 나를 본다. 오늘따라 적막강산처럼 인기척 하나 없어 다들 어딜 갔나 했더니 오호라, 당신이 여기 주지셨소.


노트를 덮어두고 사찰을 걷는다. 가던 걸음 멈추고 꽃 혹은 빛을 응시했던 장소들, 무아망아와 무망이 나 없이도 셔터를 눌러던 그 장소들을, 기억 이전에 내 몸이 빠짐없이 실천하고 있었다. 완벽했다. 말도 안 돼, 나 아직도 그 계절에 있나 봐. 산수유와 송사리가 가물가물 잠든 계곡,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어. 그리고 하얀 목! 제 실루엣 너머 지수화풍으로 터질 듯한 세계의 끝 목련!  단단하고 튼튼한 존재 앞에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았다. 꽃의 마음에 근접할 듯 비로소 간절해지려는 그때, 


뎅그렁. 꽃에게는 마음이 없습니다.


바람이 불자 종소리가 울리고.

(바람이 불면 종소리가 울린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


불이 켜졌습니다. 건너가시오.


바위들 틈마다 진달래가 등불처럼 길을 밝히고.

(진달래는 가능성의 표지라는 사실을 기억할 것.)




칼날이 무디어졌다. 다시,


칼날을 잃어버렸다.


시간이, 시계도 없이 째깍거리고 있다.


시계 역시 시간을 잃어버렸는지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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