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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Apr 05. 2024

(그래 알았다)

눌은 과거 박박 씻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살아가자고, 티끌, 그래, 그것부터 다시 모으자고, 불현듯 중얼거렸다. 잊히지 않으면 잊을 수 없다면 모른 척이라도 하자고. 마구 쓴 다음에 싹 치워두자고.


잡생각을 덜어내는 데 소진된 종이와 잉크가 아까웠다. 종이와 잉크가 아깝다고, 한 줄 더 추가했다. 아깝다면서 이런 글을 왜 자꾸 쓰는 걸까, 라고 또 한 줄 추가했다. (라고 또 여기에 쓰고 있다.) 


돈 때문에 죽고 못 사는 이들을 주변에서 본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 역시 믿고 싶었건만, 우리들의 그러진 도시에서 가난은 대수였고 가난은 비수였다. 우는 얼굴들 앞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애써 같이 울지 않는다. 울고 싶으면 울라고만 말한다. 그리고 잔을 든다. 치어스. 내가 돈이 생긴다면 귀신이 되어서도 내 앞에 앉아 눈물 흘린 이들에게 전해주리라. 정말이다.


그런데 렇게 오지랖 넓은 내가 하필 그중에서 가장 변변찮은 인간이다. 백수 중의 백수, 거지 중의 거지, 내가 이 구역 왕초 거지이시다. 미안합니다아. 


친구가 에라 모르겠다 나 진라면 샀다 고 말했다. 나도 에라 모르겠다 나 삼양라면 샀다 고 말했다. 뭐가 웃긴 건지 한참 웃었다. 반갑구만! 반가워요! 라면이 우리에게 일용할 웃음을 주나니. 아, 라면이시여. 아멘.


하루는 사람 없는 산으로 갔다. 하루는 사람 많은 강으로 갔다. 숲 속에서는 진달래를 따라 걸었고, 강가에서는 흰나비를 따라 걸었다. 내 마음은 어디 있는지.


배고플 땐 생각을 안 해야 된다. 배고프다는 생각을 한번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참을 수 없다. 누구누구 때문에 괴로울 때도 생각을 안 해야 된다. 반추와 후회와 원망이 한번 시작되면 그때부터는 가망 없다. 망한다. 말짱 도토리이다.


하루는 취해있는 광인이고, 하루는 깨어있는 현자다.  


나는 매일 다시 태어난다.


그런데 어제보다 별로인 나일 때가 더 많다.


그러고 보니 서울에 산지 20년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아직도 뜨내기처럼 굴고 있다. 다음 이사는 어디로 가지? 하도 뗐다 붙여서 접착력을 잃은 포스트잇처럼, 아무리 얇게 접고 접어도 팔랑거리는 이 한 몸 붙이지 못한 서울, 서울의 지도를 펼쳐 본다.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어디로도 갈 데 없다. 지하철은 돌고 돌고 돌고. 본적이란 가족관계증명서에나 나오는 고루한 행정 용어다. 가족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다. 집이라는 개념도 없고 이웃이라는 개념도 없다. 앞집과도 윗집 아랫집 대각선집과도 서로 인사하지 않는다. 숙소와 행인, 그리고 각자의 여행 가방뿐. 다들 다음은 어디로 가실 건가요? 층간 소음으로 응답하는 친절한 여행 가방들. 네, 살아 계시는 군요. 나는 없는 척 하렵니다. 전 세입자의 제2금융권 대출 이자 독촉장이 아직도 꼬박꼬박 날아오고 있다. 수상한 남자가 주기적으로 벨을 누른다. 아 나 그 사람 아니라고요. 내 것만으로도 벅차 죽겠는데 장난치나. 아직도 새롭게 전세 사기를 당한 이들이 나에게 상담을 요청하고 있다. 사기에는 불황도 없나.


사람이 죽었다 깨어나면 "아, 잘 잤다"라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


이대로는 안 된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을 생각해 내야 한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월급쟁이로 살아온 걸까?(그런데 월급쟁이의 삶을 일구어 내는 것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독하게 살았다 돌때기 삽질하다가 까무러칠 뻔했다 그러나 수없이 위기를 넘겨서 여기까지 왔도다도다)(그래 알았다)


오늘도 도서관 구석탱이에 앉아서 시를 읽었다. 도서관은 백수들의 천국이다. 공짜라서 괜히 훔쳐 읽는 기분이다. 그래서 더 다디단가. 이놈의 시 양갱. 언젠가는 소설이  뜬 글처럼 느껴진다고 말해놓고는, 붕 뜨기로차마 둘째 가라고 할 수 없는 시를 읽는 나는 나를 모르겠어. 나 없는 내 이야기, 나 같은 남 이야기, 혹시 이거! 소설인가?


집으로 오는 길에 악마 같은 꼬마애가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빽빽 소리를 지르며 다리를 득빠구르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 엄마는 애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런데 몇 걸음 지나고 보니 이상하게 애랑 같이 목놓아 울고 싶어졌다. 나는 저기에 침묵한 채 옴마니 메훔 구간 반복 중인 엄마에게 이입해야 하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저 애…… 저 애 좀 봐……


하지만 난 어릴 때 아주 과묵했답니다. 그러니 좀 이해해 줘요. 당신도 이해해 줘.


길 가다 멈춰 서서 자목련 이파리를 만져본다. 이러다 남의 집 담장 휘뚜루 넘어가겠다. 사월 되니 라일락도 피고 조팝나무 꽃들도 퐁퐁 맺혔다. 얼뜨기처럼 고개를 처박고 향기를 맡는다. 누가 보든 말든 상관없다. 자기도 해 보고 싶나 보지.


마음을 강하게 먹자. 이번엔 진짜야.


그러다가 얼마 못 가 한순간 우수수 흘러내리고. (가죽만 남은 개구리 같아.)


살아남자!


그런데 잘 모르겠어…….


선으로 견딘 사람은 악으로 견딘 사람과 다르다고 느낀다. (이 생각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해가 지기 직전에 잠깐 하늘이 밝아진다. 사람도 죽기 직전에 잠깐 놀라울 정도로 기운이 돌아온다고 한다. 파산 직전에 갑자기 식욕이 돌아서 동네 빵집들을 순례하며 잔고를 탕진했다. 오, 하늘이 밝구나. 내 존재를 돌이켜 비추는 (양갱이 아니라) 이었느니라.


이렇게 시끄러운 글을 쓰는 나는 묵상하는 여인이니라.


요즘 다시 종이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종이를 낭비하고 있다는 문장으로 종이가 낭비되고 있다. 그러나 낭비야말로 일기의 진정한 용도다. 일기는 문학일 수가 없다,는 게 긴 고통 끝에 도달한 나의 결론이다. 나의 글쓰기는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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