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라 Apr 18. 2024

최종 면접에 합격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최종 면접에 합격하셨습니다.


전화를 받은 뒤 준비 서류 목록 문자를 읽으며 망연해졌다. 결국 내가 나를 배신하는구나. 안녕히 개새야! 이봐요 나 개돼지 아니거든요? 씩씩 억억 요란하게 박차고 나왔던 바로 그 지옥으로, 큭. 내 발로 돌아간다. 발버둥을 쳐 보았으나 돌아가지 않을 구멍수가 없었느니.


어게인, 백 투 더 헬.


사월이 되고 맹독을 뿌려댄 탓일까, 알바와 프리랜서와 계약직의 쿵짝 박자가 제대로 꼬여버려서 일시적 쓰리잡러가 되어버렸다. 오월에 약 삼 주간은 하루도 빠짐없이 일해야 한다. 감당할 수 있을까? 꽃도 책도 댕강 안녕.


스탠바이.


PD로서의 삶을 다시 한번 2년 연명한다. 가도 이 지옥이 아니라 저 지옥으로 가리라고 벌겋고 퍼렇게 울어댔건만…… 현실의 나는 N잡 시대에 한 우물만 파온 멍청한 자였기에 이 지옥 말고는 두드릴 문도 없었고,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는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관속에서 뚜껑을 열고 몸을 일으킨다. 우지끈. 첫 출근이 달력 저기서 기다리고 있으매. 아, 출근이라는 저승사자여! 그대의 명부에서 내 이름을 지워줄 수는 없겠는가?


2년. 앞으로의 2년 동안 나는 이 세계를 탈출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출 것이다. 벼랑 끝 실업자의 근기로 아끼고 모으며, 빚과 이자를 줄이고, 다음 이사를 해결하고, 2년 후로 미뤄진 재난 상황에 필요한 물자를 더욱 꼼꼼하게 비축하면서, 동시에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배우고 준비한다. 생활은 최소주의! 부는 최대주의! 알겠나?  


한편 두려웠다. 한편이 아니다, 너무나 두려웠다. 지난날 나는 직업에 대해 삼엄하게 뒤돌아선 마음으로, 나 자신의 신경과 감각을 완전히 차단시켜 버렸다. 일 년 넘게 편집 프로그램은커녕 그 흔한 유튜브조차 켜지 않았고, TV도 영화도 그 어떤 트렌드도 거들떠보지 않고 살았다. 플레이 버튼 없는 단순한 삶은 나의 이상理想이었다. 그러나 곳간은 날이 갈수록 헐후하여 나의 시방세계도 한없이 비루해져 갔다. 그렇다 하여도 이제 와서! 다시 필드를 뛰어다닐 수 있을까. 번아웃이라는 부상은 여전히 물렁팥죽이거늘. 나는 거대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억지밖으로 나갔다. 닥치면 하겠지 뭐,라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면서.


좋은 소식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하던 지인들에게 연락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옥으로 돌아가는 게 축하받을 일은 아니잖아. 연봉도 3분의 1이나 깎였는데. 자주 가는 장소 한 군데로 버스 알람을 맞추고 걸었다. 길 모퉁이를 도는데, 낯선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OO시장으로 가야 하는데 A번 버스가 여기에 오는 게 맞냐고. 폰을 열어 보니 내가 타야 할 버스 시간이 초 단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이럭저럭 해도 여전히 서울의 종족답게 초 단위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퍼뜩, 표정을 폈다. 내 알람을 끄고 그분의 목적지를 검색해서 버스가 오는 곳까지 데려다주었다. 걸어가는 동안 괜히 시간 뺏는 거 아니냐고 하시기에, 무슨요, 하며 앞만 보고 웃었다. 버스정류장을 알려드리고 돌아서는데 할머니가 말했다.


"복 받으세요. 복 받으세요."


"……"


돌아서자마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너무 과분한 축복을 받은 것 같았다. 기도당 같은 곳에서나 하는 정성스러운 말을, 그것도 두 번씩이나. 고작 몇 분 내어줬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스쳐 지나는 모두가 나에게 힘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아무에게도 말 못 한 내 이상한 마음이 웅숭깊이 위로받은 순간이었다. 물기가 주책맞게 흘러내리기 전에 스윽 닦고 가만히 한 번 웃었다.


파이팅.




그동안 나를 돌봐준 계절의 전령들에게 인사를 하러 가야겠다. 햇살에게, 바람에게, 당분간 볼 수 없겠지만, 자연으로 돌아오기 위해 걸어가겠다고. 꽃에게, 별에게, 쓰기 위해 쓰지 못하는 시간들을 견디겠다고.


아무리 못된 글을 써도 그 속에 꽃 이름이나 풀 이름 하나는 꼭 넣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그날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쓰다 보면 직장인의 일기는 결국 짜증, 소음, 피로, 불면, 스트레스로 대표되는 갖은 상스러운 단어들로 가득 차곤 했다. 환경 오염은 마음 오염으로, 마음 오염은 글 오염으로 이어졌다. 못된 글과 착한 글 사이의 간극이 너무 아득해서 나는 때때로 나를 잃어버렸다.


아아, 자연에 대한 그리움은 한층 깊어지리라.




브런치라는 가상공간에서 할 말 못 할 말 칠칠팔팔 써 내려가면서, 모든 것을 리셋할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현실에서 나는 좀처럼 내 얘기를 꺼내지 않는 사람인데, 여기서 내 고독은 너무너무 시끄러워서……. 이곳에 정제된 글만 정리해서 올리리라 결심했었지만, 실상은 늘 정반대였다.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여기서만 했다. 그만큼 죽도록 부끄럽지만, 그만큼 솔직할 수 있었으므로.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여전히, 살기 위해 쓰고 있다.

이전 18화 한 장의 꽃잎이 태양을 가르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