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CI 기질 및 성격 검사에 대해 설명을 듣기로 한 날이었다. 검사를 한지 두 달이 넘었기 때문에 내가 뭐라고 답변했는지, 어떤 검사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는데 결과는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이런 류의 검사라는 것은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바뀌는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떤 수치가 +100이 나왔다면 적어도 -100 쪽 방향은아니라는 거다. 어떤 기질이 대해 좋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거라고 하셨지만 내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나온 결과들이 너무 많아서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TCI검사의 [기질]에는 자극 추구/위험 회피/사회적 민감성/인내력이 있고, [성격]에는 자율성/연대감/자기초월/자율성+연대감이 있다.
기질
[자극 추구] 36%
[위험 회피] 100%
[사회적 민감성] 12%
[인내력] 8%
(백분위 표기, 50을 평균으로 본다. 30 이하면 과소, 70 이상이면 과대.)
뭐라? 인내력 8%?
사회적 관계에 있어 예민은커녕 둔감한 사람에 속하고, 자극적인 것은 좋아하지 않으며, 인내력은 부족하다 못해 심각하고, 위험은 극도로 회피한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인내에 관해서라면 너무 참아서 문제인 사람에 속했으면 속했지, 그 반대는 단연코 아니었다. 무언가를 근면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나의 특기에 속하는 편이다. 대부분의 항목이 내가 살아온 삶과 정반대였다. (혹시 자기부정 단계인가?)
나는 적어도 매년, 또는 한 해에도 여러 번 이사하거나 이직하며 살아왔고, 보통 사람들은 위험하다고 꺼려하는 남미에 여자 홀몸으로 돌아다니기를 여러 번이다. 직업 역시 현장 촬영이나 라이브 방송이 많았고 창의력(자극 추구)과 사회성을 특히 요하는 분야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내 타고난 기질과 맞지 않다는 말이었다. 선생님은 기질과 반대되는 환경이 기질을 더욱 자극해서 강화시켰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대화 중에 몇 가지는 납득할 수 있었다.
1. 나는 현장 촬영이나 라이브 방송 진행 때마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 있었고, 스릴을 즐기기보다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편집 업무가 훨씬 더 좋았다. (위험 회피 성향)
2. 2년이라는 계약 기간을 과도하게 불안해한다. 계약 안에 묶인 지금의 바쁨을 오히려 삶의 휴가처럼 느끼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계약직들이 이렇게 불안해하는 것은 아니다. (위험 회피 성향) - 하지만 이것은 약 14년 동안 반복해온취업 및 실업의 (온갖 부당한) 경험과, 취업 시장에서 불리한 나이(30대 후반)의 여자라는(그것도 체력 거지의) 현실 등 후천적 경험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건 진짜 현실이잖아?)
3. 새로운 조직에 들어갈 때마다 적응하는데 남들보다 긴 시간이 걸리며(그렇게 이직 경험이 많은데도), 사람들과 쉽게 사귀지 못해서 겉돌며 방황하는 시기를 거의 꼭 거치고 나서야 서서히 오해를 풀며 안착한다. 이 또한 반복적인 교류를 통해 '안전하다'고 느낀 상대에게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여는 사람이라서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위험 회피 성향)
3-2. 생각해보니 이 부분은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러니까 나는 타고나길 찐따?...)
위험 회피가 맥시멈을 찍었다 보니, 선생님은 이 지점을 해석의 출발점으로 삼으셨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다음 스텝'을 집어던지고 홀로 남미로 훌쩍 떠나곤 하던 시절에, 나는 진심으로 안전하다고 느꼈다.낮에는 소매치기와 잡사기꾼이 득실거리고 밤에는 마약 카르텔과 유괴납치범이 득세하는 지구 반대편보다, 당면한 내 삶의 치안이야말로 자극이고 공포였던 것 아닐까?
인내력에 대해서는 답변 문항을 떠올리며 '성취'로 치환하여 스스로 해석해 본다. 나는 경쟁을 무척 싫어하고, 누군가 나를 밟고 올라가겠다고 한다면 그냥 포기하는 편이, 억울은 하지만 마음 편하다. 야망을 가지라는 말은 피곤하고, 때로는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편을 택하기도한다. 어쩌면 나는 '불안한 상태'를 견디기 어려워 하는 건지도 모른다. 만약 지속적인 칭찬과 응원이 없어도 끈기 있게 해나가는 것을 인내력이라고 할 수 있다면, 나에게는 의외로 끝없는 칭찬과 잦은 보상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지나치게 당이 높다고 생각해 자체적으로 금기시해 왔던 삶의 사탕들이, 어쩌면 나에게는 허약한 정신에 힘을 불어넣는 괜찮은 처방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내가 가장 인내할 수 없던 것은 나 아니었을까?
성격
[자율성] 5%
[연대감] 65%
[자기 초월] 96%
[자율성+연대감] 23%
자율성이 극단적으로 낮게 나온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 중에서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와 정반대로 지나치게 독립적이며 과도하게 책임감이 강한 편이다. 생활을 꾸려나가는 힘도,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도, 물심양면으로 비빌 언덕 없이 살아왔다.나는 '자율'이 아닌 방식으로는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째서?
다시 한번 검색해 보니, '삶에서 원하는 것을 분명히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라고도 한다. 그 문장을 읽고, 내가 체크한 항목들이 생각났다. 요컨대 이런 것이다,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없다.' '개인은 철저하게 무능하다' '결국 모든 것은 공허하다' 나는 그냥 해도 해도 안 되는 이 세상살이에 지친 게 아닐까?
연대감은 다른 항목에 비해 괜찮은 편이라고 하셨다. 사회적 민감성이 낮고, 위험 회피가 높으며, 자극추구도 낮은 사람(절제)이 사회생활 속에서 거슬리는 행동을 할 확률은 매우 낮다고 하셨다. 그건 정확한 진단이었다.
자기 초월도 거의 맥시멈을 찍었지만 시간 관계상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부분이 너무 높아 따로 검색해 보았는데,
-꾸밈이나 사심이 없고, 창조적이고 영적인 사람
-상황을 통제하려 하기보다는 묵묵히 받아들이는 경향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했을 때도 받아들임
-소유욕이 없으며 이상주의적
놀랍게도 내가 앞서 가졌던 의문점이 여기서 상당 부분 해소되는 듯했다. (이 부분을 파고들지 못해 아쉽다. 50분은 너무 짧다.)
마지막으로 자율성+연대감은 이 검사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인데, 30 이하는 살아가는 데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라 했다. (라고 말씀하셨지만 검색해 보니 성격 장애가 있을 수 있다고 함.)(...)
이번 주제는 아직 이해는 잘 되지 않지만, 그래도 '나'라는 이미지를 역상으로 뒤집어 보는 시간이었다. 의문점에 대해 더 상세한 검사를 받아보고 싶어졌지만 그럴 비용은 없다.(...) 결과에 대해서 한동안 생각해 봤지만, 여전히 절반은 느낌표고 절반은 물음표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저 그럴 수도 있구나, 하면서 한 번쯤 낯선 방향에서 나를 이해해 보기로 한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어떤 삶을 꾸려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참고 자료로 삼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