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 동안 이 생각 저 생각에 들렸다 놓이기를 반복했다. 어떤 이야기는 대문 밖으로 꺼낸다는 상상만으로도 이상하리만큼 간절해져서 아무도 모르게 눈물방울들을 매달고 다니기도 했다. 가볍고 동그랗고 투명하고 조그마한 마음들. 손으로 스윽 닦으면 사라지는. 정말로 그런 게 가능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하지만 막상 상담 시간에 임박해서는, 다시 면접 보는 기분이 되어 긴장한 채 불안하게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시작하며 우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물어보셨다. 있었던 것 같은데(눈물까지 삐죽거려 놓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정말 기억나지 않았다.) 그 뒤로는 생각나는 대로 날탕 대답했다.(아무래도 다음 주에는 메모를 해가야겠다. 선생님은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날 때마다 문자를 보내도 된다고까지 하셨다.) 우선 한 주의 근황. "왔다 갔다 했어요.(이때의 '왔다'와 '갔다'는 '그래도 살아보자'와 '역시 그만하고 싶다'를 의미한다.) 지난주에는 만나자는 사람들을 4명이나 거절하고 집에 혼자 있었어요. (술 마셨다는 건 말 안 함). 하지만 일주일 중 딱 하루 쉬는 날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 하루는 쉬지 않으면 안 됐어요. 저는 너무 바쁘거든요……."
그러다 자연스럽게 몇 달 전 쓰리잡을 시작한 부분으로 넘어갔다. 현재는 투잡 중이며 주 6일 또는 주 7일 일하고 있다. 알바 하나는 사기를 당해서 돈도 못 받았다. 액수 또한 사기에 가까울 만큼 적었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너무도 절실했고, 싸워서 받아내자니 감정에부치고 버거워 결국 포기해 버렸다. 하지만 억하심정은 마음대로 포기되는 것이 아니어서 목소리는 점점 떨리는 음을 발산하고 있었다. 사실 이 억울함은, 그동안 내가 가슴에 눌러온 수다한 억울함에 비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고래와 빙하 사이를 헤엄치는 크릴새우 한 마리에 불과했다. 거기서 나는 크릴새우 한 마리를 빼앗겼다고, 그 새끼는 정말 나쁜 새끼라고, 지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울고 싶었던 것이다.
알바 사기에 이어 전세 사기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이제 조금 지난 이야기지만 나의 역사 속에 큰 상처로 자리 잡은 것들. 결론적으로는 잘 싸워냈지만 과정 속에서 너무도 불가해한 아픔을 겪어야 했던. 비슷한 처지의 청년들이 자살하는 것을 지켜보고, 세상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불신과 증오를 다지고, 그저 개인의 힘으로 빈곤과 극난을 버텨내야 했던. 나는 유일하게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된 사례자였지만, 그건 명분이고 광고일 뿐이었다. 싸움이 끝난 전쟁터는 폐허와 환멸뿐이었다. 그 상태로도 새로운 적들은 끝없이 밀려왔다. 나쁜 적들과 싸우고 나면 더 나쁜 적들이 쳐들어왔고,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계속해서 싸웠을 따름이다. 살아남아야 하니까. 삶은 그런 식으로만 이어졌다.
"그래도 20대 때의 저는 좀 더 밝은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원래도 아주 밝은 사람은 아니었지만요, 그래도 그때는 꽤 활기차게 지냈거든요. 일하면서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자격증들을 따고, 외국어를 독학하고, 남미를 돌아다니고, 그거 말고도 취미가 정말 정말 많았어요. (악기 연주, 요리, 뜨개질, 글쓰기, 사진, 그림, 여행……) 그때는 회사에서 계약 연장이나 정규직 전환 약속을 안 지키고 배신해도 지금처럼 무너지지 않았어요. 괜찮았어요. 힘들었지만 곧 괜찮아졌어요. 저는 잘할 수 있고, 더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열 군데가 넘는 회사를 옮겨 다니며 불안정하게 살았지만요. 끈기가 없다거나 버티기 힘들어서 그만둔 적은 단연코 없었어요. 전부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 계약 기간을 다 채웠거나 이직을 했거나, 그도 아니면 회사에서 약속을 안 지킨 경우가 많았어요. 대부분 이름 있는 큰 회사였는데도 업계가 그랬어요. 영상업은 비정규직 문제가 너무 심해요.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받아들이고 살았지만요. 이제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요. 다른 방법, 다른 설계가 필요해요. 지금 저는 선택해야 돼요. 2년 안에 대책을 마련할 건지, 아니면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갈 건지."
선생님은 누구보다 나약하게 피로에 절어 있는 나에게, 두 번밖에 안 만났지만 오히려 에너지가 엄청난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본인은 잘 모르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사기를 당해도 상의를 할 사람조차 없는 환경 속에서 오로지 내가 나를 살리면서 살아온 거라고. 기특하다,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울음을 참느라 거의 표정이 찌그러지고 말았다. 그때의 내가 얼마나 못생겼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말을 육성으로 들어본 적이 있었을까? 방법이 무엇이든, 광분이든 은둔이든, 내가 나를 죽고 싶음에서 구해내면서, 말 그대로'살리면서' 살아왔다는 것. 지금이라도 매일 밤 술을 마시는 대신 기특하다, 하고 칭찬해 주면 안 되는 것일까? 선생님은 자기 전 한 번씩 나를 칭찬해 주라고 하셨다.
나는 변명했다. 나는 실업 후 1년 반동안 의지를 상실하고 모아둔 돈을(얼마 없었지만) 이자와 세금으로 모조리 탕진해 버렸고, 지금은 어쩌다 얻은 (또) 계약직 신분으로 절망을 유예하면서 속죄하듯이 바쁘게 살며 빚과 이자를(보증금, 학자금 등등) 갚고 있다. 그러므로 이건 일종의 만회에 불과하다. 선생님은 그래도 '지금 열심히 사는 것'이지 않냐고 하셨다. 그렇다고 해도 칭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하셨다. 그 순간 "열심히 사니까 예뻐요"라고 말해주었던 알바 장소 앞집의 동네 할머니가 생각났다. 아마 내 표정은 조금 더 찌그러졌을 것이다.
선생님은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해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내가 거절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나와 관계를 이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맞다, 하지만 나는 주로 잘 들어주는 편이라, 말하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만 남은 것 같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말하기'만' 좋아하는 사람들. 귀는 없고 입만 있는. 만나고 헤어지면 상대방은 너무 즐거웠다고 말하지만, 나는 너무 피곤했다고 생각하는 그런 만남. 선생님과 대화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제부터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됐을까. 나는 원래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을까. 혹시 말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을까. 사실은 귀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너무 오랫동안 귀를, 귀를, 귀를 다 팔아 버려서(귀 재고 없음!)한때는 매일 아침 활기차게 열려 있던 귀를 서서히 닫고, 입을 닫고, 대문까지 닫아버린 건 아니었을까. (그리고 글 속에서 종알종알…….)
1회 차 때보다는 말을 많이 했지만 사실은 오늘도 무척 두서없었다. 선생님은 이번에도 자신의 아픈 과거사를(정해진 시간을 한참 넘어서까지) 많이 들려주셨다. 심지어 어떤 이야기는 나에게처음(!) 꺼내는 이야기라고 하셨다. 가까운 이의 자살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나 역시 기어이 그쪽으로 걸어갔던 친구가 생각나 슬픔에 가득 몰입한 채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결말은 달랐다.선생님의 이야기야말로 해피 엔딩이었다.(중간 생략.)50대 후반의 선생님은, 정말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사람 같아 보였다. (찌개용 두부가 아니라, '부침용 두부' 같은!)
"선생님, 저는 노력하고 있어요."
나는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내뱉은 건 의외였다. 하지만 그건 정말이었다. 솔직히 가망 없어 보이지만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 때때로 큰 절망에서 작은 절망으로 넌지시 건너가 보기도 한다는 것. 이렇게 퇴근을 하고 상담을 하러 온다는 것. 비록 약속을 거절하고, 술을 마시고, '왔다 갔다' 하지만 말이다.
상담을 마치고 나와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오는 길에 자꾸 눈물이 났다. 기특하다, 라는 말이 자꾸 생각났다. 그건 입이 아니라 귀가 한 말이었다. 나는 귀가 있는 사람으로부터 그 단순한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바보 같이. 눈물을 스윽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