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라 Sep 29. 2024

갱생 의지

덜 싫다, 가 아니라 조금 좋다, 라고 쓸 수 있을까? 모든 것에 대해서.




6회의 심리 상담 일정을 앞두고 있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조금은 나의 외출을 가볍게 만든다. 심리 상담이라는 것을 해본 적도 없고 믿어본 적도 없지만 우연히 기회를 얻게 되었고, 기회를 얻었지만 내 마음을 음성으로 꺼낼 수 있을지 도저히 자신이 없어 일정을 잡는 과정에서 거의 취소할 뻔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마음이든 몸이든 [집 밖으로] 외출이라는 것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을 일종의 짧은 비망록으로 남겨두고 싶다.




직장을, 보증금을, 꿈을, 사랑을, 건강을, 한때 내 영혼을 윤활했던 모든 열정을 잃고 더 이상 살고 싶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기나긴 독수공방의 날들을 지나, 임시적인 계약직이나마 안착하여 다시 사회로 나왔다. 이사를 앞두고 죽기 아니면 살기의 각오로 극적으로 일자리들을 구했고, 그 이후 약 반년 간 휴식 없이 일해다. 부족한 월급이자 부족한 체력이지만, 나는 현재 내 몸에 남은 생기를 다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모르겠다. 생활 세계의 나는 누구보다 바쁘지만 왠지 아직 독방에서 나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상담을 취소할 뻔했던 것은 순전히 사교적인 자신 없음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때로 나는 정상인 것 같다. 때로 나는 정상이 아닌 것 같다. 때로 나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다. 때로 내가 노인이 될 때까지 살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마치 다가올 미래가 없다는 듯이 노인의 마음을 앞당겨 쓰며, 그러나 하루하루는 절하는 마음으로, 나는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부터 내 삶에는 영화도 없고, 음악도 없고, 누군가와의 저녁 식사도 없다. 나는 구도의 열정을 잃어버렸고, 오로지 겨울만을 기다린다. 세상의 데시벨이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귓가에 폭설이 쏟아지는 소리만 가득하도록. 겨울이 좋다.




이대로 살아도 된다, 고 생각한다. 누구나 한 접시의 고독, 한 접시의 불안으로 홀로 저녁 식사를 하며 살아가는 것 아닌가. 나는 누구도 나의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지 않다. 세상의 저녁 식사 초대에 또한 생계에 지장이 되지 않는 최대한의 범위까지 거절한다. 그러다가도 가끔은 누군가와 저녁 식사를 하고 싶다. 하지만 나갈 힘이 없다. 그럴 때 내 존재는 고독도 아니고, 불안도 아니며, 그저 부엌에 놓인 빈 접시 같다.




번아웃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치유의 대상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남몰래 달팽이 같은 우울을 품고 고, 언제라도 생활이 거리에 곤두박질쳐질 것 같은 일상적인 절망을 안고 살지만, 누군가를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고, 더 정확히는 그것이 진심으로 가능하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층계도 없이 아득한 마음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 게다가 나는 (주관적인 기준이지만) 생활에 큰 지장이 있을 정도로 우울과 충동에 휘어잡힌 적도 없고, 전세사기에 당했을 때조차 괴물 같은 회사에서 야근까지 소화해 냈으며,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진다거나 하는 공황 장애를 겪은 적도 없다.


다만 무언가 있다, 는 잔여한 감각만은 내 안에 상주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나의 귀신'이라고 칭하곤 한다. (반쯤 장난으로.) 나는 술에 취할 때마다 나 자신에게 굿을 지내주며 소신하고 공양하고 싶다.(반쯤 상상으로.) 나 자신을 나 자신에게서 끝내고 싶다.




친구가 청년몽땅정보통 홈페이지의 이사비 지원 정책 링크를 보내주어서 살펴보다가, 별생각 없이 심리 상담 프로그램을 신청했는데(뭐라도 좀 해당되라!) 덜컥 돼 버렸다(원했던 이사비는 안 되고!). 심리 상담이라니, 애초에 내가 극도로 불신하는 것 중 하나 아닌가. 그걸 하러 정기적으로 밖에 나가 누구를 만나고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의지와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스스로 치료하기 시작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그렇게 궁상맞은 짓을 할 바에야 혼자 책이나 읽고 글이나 끼적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진심이긴 하다. 솔직히 비용이라는 걸림돌이 있었다면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못했을) 것이다.


사람에게 기대하는 건 없다. 시간이 지나서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겪은 많은 불합 중에 순수하게 '개인이 잘못해서' 일어난 일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은 원래 별로다. 그래서 나는 원망하고 싶은 누군가의 '이름' 대신, 자주 '세상'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당신을 못 믿는 게 아니라, 세상을 못 믿어서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당신'들도 있긴 하지만.) 그런데 어느덧, 나 자신 또한 내가 믿지 못하는 세상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다. 모르겠다. 모르겠다감각조차 알코올처럼 머지않아 모조리 휘발되고 말겠지만.




다만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다가오는 시간과 통과해 나갈 내 마음을 조각의 형식으로나마 기록해 놓고 싶을 뿐이다. 부디 어떤 위악도 없이.




좋은 계절, 모처럼의 외출으로 인해 이 가을이 조금 더 길어지기를 소망해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