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500일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

D-124

by 세라

예전에 친한 선배가 자주 했던 말이 있다. 사람은 언젠가 자기가 들었던 말만 할 수 있대. 그러니까 내가 사랑의 언어를 말할 수 있다는 건 언젠가 내가 사랑받았던 증거라는 것, 사람이 할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사랑을 받아본 사람 사랑을 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내가 발화하는 착하고 예쁜 말들은 내가 언젠가 들은 것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이상스레 어슬해졌고, 문득 서늘해졌고, 한편으로는 평생토록 글문에 비해 말문이 트이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이 내 빈궁한 사랑의 경력 때문은 아닐까 했었다.


그런데 나는 오늘 갑자기 이렇게 선언하고 싶어져서…사랑을 받아봤던 사람이 사랑할 줄 안다는 것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받은 만큼 줄 수 있다는 건 사랑이지만 받은 만큼만 줄 수 있다는 건 사랑일 수 없. 받을 만큼 받았지만 주기는커녕 받을 줄 모르는 사람도 수두룩하지 않은가. 그에 비해 제대로 받아본 적 없어도 마음을 내어줄 건 그 무엇보다 사랑이다. 평생 노숙하듯이 살아온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랑할 수 있다. 한 존재가 한 존재를 사랑할 줄 없다고 감히 누가 말하겠느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힘든 일을 겪었을 때, 내가 나 자신의 엄마아빠가 되어줄 거야! 하고 결심해 보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절망에 빠진 채 마지못해 그날그날을 살아낸 사람도 다시 보면 그 역시 최후의 최후까지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살려낸 원천적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을 서운하게 하고 싶지 않은 내 마음도 사랑이다. 상황에 따라 친구를 바꾸어가며 득실에 따라 행동하던 사람이 기회주의적으로 내게 다가올 때, 한 발 물러나 그 무게 없는 영혼을 보듬어주는 것도 사랑이다. 다가오는 사람 받아주고, 떠나가는 사람 보내주는 것도 사랑이다.


미워하지 않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려운 건 미워하는 나 자신이다, 미워하는 나를 미워하지 않기도 어렵다, 그런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이다.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녔지만 모진 말투를 지닌 이에게 때로 단호하게 조언을 해주는 것은 그이에 대한 나의 사랑이다. 그러고도 마음이 쓰여서 미안해하는 것도 내게서 쏟아지는 사랑이다, 사랑이다, 나는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랑의 부익부빈익빈 이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게 사실은 내가 가진 것이 없어서 하는 자기변명일 수도 있다, 그거 다 네 열등감 때문에 하는 말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틀리지 않다, 그래도 나는 삶에 지친 주변의 동생들에게 누구야, 마음을 너무 모질게 쓰지 말어라, 나는 네가 착하고 예쁜 것을 안다, 하고 말해주고 싶었고, 이토록 못난 나 또한 나름의 애씀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있는 그대로 언제든지 숨김 없이 터놓고 싶었,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니, 잠시나마, 잠시라도, 나는 너에게 곁을 내어주고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 마음은, 사랑이다, 내 방식대로의, 사랑이다.


있잖아, 사람은 언젠가 자기가 들었던 말만 할 수 있대.


아니요, 사람은 자기가 들어본 적 없던 말도 할 수 있어요.


사랑을 받아본 적 없던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




새벽녘 쉬엄쉬엄 일기를 쓰다 보니 덜렁 크리스마스가 돼버렸어요.


나는 네가 좋다, 그것을 잘 알아두도록 해라.

-심보선 시인의 <빙하기> 中


지난여름 이 문장을 울컥울컥 좋아했다는 걸 문득 기억해 냅니다. 나는 네가 좋다, 이렇게 직진적인 언어를 나는 들어본 적이 있었나…….


글을 통해서 어려운 마음을 함께해 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나는 당신이 좋아요.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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