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ón#2 가죽 시장
열 살 무렵이었을까. 「월리를 찾아라」라는 그림책을 즐겨 봤었다. 단짝 친구와 함께 엎드려서 책을 펼쳐놓고 빽빽한 일러스트 사이에서 방울 모자,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여행자 '월리'를 찾곤 했었다.
월리는 여행을 하며 페이지마다 무언가를 하나씩 흘리고 갔다. 그래서 갈수록 월리의 물건은 하나씩 사라졌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매우 가벼워져 있다.
나의 여행은 월리와 비슷했다. 잃어버리고, 버리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주고 떠났다. 곱씹어 보니 그렇게 나를 떠나간 물건들이 정말 셀 수 없이 많다. 핸드폰과 보조가방부터, 메모리카드, 우산, 책, 시계, 티셔츠... 아 그리고 나중에는 캐리어까지. 내 여행을 일러스트 책으로 만든다면 멕시코 도시 곳곳마다 내 물건을 하나쯤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잃어버린 것만큼이나 새로 생긴 물건도 많아서 월리처럼 가벼워지지는 못했다. 버리고 또 버려도, 결국엔 또 무언가가 생겼다. 매일 마주하는 새로운 일, 새로 알게 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이날 레온에서는 그동안 잃어버려서 불편했던 보조 가방을 사기로 했다. 사실 몇 도시 전부터 사고 싶었는데 계속해서 적당한 가방을 찾지 못했다. 대부분 거기서 거기고, 정말 괜찮으면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레온은 가죽으로도 유명하고, 시장도 크다고 하니까 기필코 이곳에서 사고 말리라. 자아, 시장으로 출격!
네, 이곳은 레온의 가죽 시장입니다.
네, 이곳은 레온의 가죽 시장(La zona piel)입니다. 레온에 왔으니 가죽 시장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네요. 날씨는 역시 정말 덥고요. 시장은 너무너무 넓네요. 저렴한 가죽 지갑들이 있길래 남동생에게 사줄까 고민했는데 한국은 새벽이라 그런지 답장이 없네요. 살까요, 말까요? 생각해보니 동생은 이미 메이커 지갑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허름한 시장 지갑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겠죠? 더운데 이 돈으로 하마이까 주스나 사 먹어야겠어요.
시장은 구획으로 크게 크게 나누어져 있는데요. 쇼핑 상가가 끝도 없습니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생긴 것도, 파는 물건들도 비슷한 상가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만약 마음에 드는 걸 찾는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사야 합니다. 다시는 찾아올 수 없을 것 같은 비슷한 구조의 연속이거든요. 아직까지는 살만한 게 딱히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명성답게 가죽 구두가 화려하지만 배낭여행자가 살 만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의외로 운동화가 좀 싼 것 같은데요, 지금 저에게 운동화는 필요하지 않네요. (아니나 다를까, 멕시코에서 생산되는 신발의 60% 정도가 레온에서 생산된다고.)
호객을 하는 상인들도 많아요. 가방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Bolsa(볼사)? 하면서 사다리를 타고 어디선가 자꾸자꾸 가방을 꺼내서 보여주는데, 어떡하죠,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왔다 갔다 고생하셨는데 거절하기 좀 미안합니다. 그래도 별 수 있나요, 저는 가난한 여행자인걸요.
돌아다니다 보니 다른 건 그저 그렇고, 의외로 가죽 구두 미니어처 술잔들이 예쁘네요. 길거리 노점상에도 있고, 샵에서 팔기도 합니다. 가격도 다양하고요, 비슷한데 은근 싸구려 같은 것도 섞여 있네요? 이 근처의 도시들에는 이렇게 신발 모양 기념품들을 많이 팔아요. 그래도 이거 하나만큼은 레온이 가장 다양한 것 같아요. 저는 사실 레온 시장을 꽤 오래 돌아다녔어요. 솔직히 괜찮은 가방을 찾는 데 지치고 말았답니다. 그리고 엉뚱하게 구두 모양 잔을 한 세트 샀습니다. 남동생이랑 같이 데낄라나 한 잔 하려고요.
혹시나 다른 게 있을까 하고 한 골목 더, 한 상가 더, 계속 들어가 보았는데 생각보다 개성이 없어서 실망스러웠어요. 사실상 거의 포기했다고나 할까요. 평소에는 사고 싶은 게 잔뜩인데, 꼭 사려고 눈에 불을 켜고 보면 없다니까요. 호기롭게 출발했던 만큼이나 미련 가득한 채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걷느라 지쳐서 대로 쪽의 쇼핑몰에 잠시 들어갔습니다. 실내 벤치에서 잠시 쉬어가야겠어요. 쇼핑몰 안에도 가게들이 많은데요. 좀 쉬고 나서 듬성듬성 불 꺼진 가게들을 한 바퀴 돌아봤습니다. 그러다 복도 가장 끝에 있는 가방 가게를 하나 발견했어요. 마지막으로 보고 가자는 심정으로 들어가 봅니다.
하나도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같지만, 나름대로의 법칙으로 걸려 있는 거랍니다. 사이즈나 색깔 같은 걸 물어보면 가방 더미 속에서 쓱쓱 찾아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의외로 이곳에서 그나마 마음에 드는 가방을 발견했습니다. 아주 예쁘지는 않지만 여행하는 동안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흥정을 시작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이 가방 아저씨, 정말 고집스럽네요. '진짜 가죽'이라며 '수제'라며 한사코 양보하지 않습니다. 다른 것보단 낫지만, 그렇게 고퀄도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심통이 납니다. 멕시코 물가를 생각하면 600페소(약 3만 7천원)는 비싼 거 같은데 말예요.
이미 가죽 시장을 다 돌아보고 난 후라 지쳤고, 다른 데 갈 마음이 1%도 없다는 걸 알아챈 걸까요? 이쯤 되면 자존심 싸움이 된 거지요. 사실 1000원만 깎아줘도 바로 살 것 같았거든요. 아아, 하지만 빈 손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허무해요... 더 이상 가방을 찾느라 멕시코를 헤매고 싶지 않았어요. 네, 네, 제가 졌습니다. 500페소짜리 한 장은 비상용으로 들고 다니는 건데, (4-50페소면 푸짐한 식사 한 끼인걸요) 결국 가지고 있던 현금을 탈탈 털어 가방을 샀습니다.
.. 잘 산 걸까요?
그리하여 레온 이후부터 나의 여행에 언제나 함께 한 이 가죽 가방. 페루에서 약 0.8솔(약 300원)에 산 라마 인형과 함께 완전체가 되었다.
이 가방은 다행히도 여행 끝까지 잃어버리거나 찢어지거나 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월리를 찾아라」 나의 여행 버전에서는 방울모자, 줄무늬 티셔츠 대신 이 가죽 가방을 찾으면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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