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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May 02. 2019

당신은 청년인가요

나이를 잊은 그대에게 

작업실이 있는 건물 게시판에 포스터가 한 장 붙었다. 시에서 나서서 여성 청년 창업자에게 다양한 지원을 해주겠다는 공고였다. '1인 기업'을 운영해보면 어떨까 막 고민을 시작한 단계여서 눈길이 갔다. 한참을 서서 보고 있는데 지나가던 지인이 나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여기서 뭐해요?"     


"아, 1인 기업 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는 사업이 있어서 보고 있어요."     


지인도 포스터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에이, 김 선생은 자격이 안 되네. '청년'이라잖아요. 여기 만 39세 이하라고 딱 나와있구먼. 아직 마음은 청춘이라 이건가? 하하하!"     


그랬다. '청년 지원사업'이라는 제목을 보고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애먼 짓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작업실에 돌아와 뭔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어 생각해봤다. 나는 왜 내가 당연히 '청년'이라고 생각했을까? 마흔을 훌쩍 넘은 내가 청년과 노년의 중간인 '중년'이란 사실을 왜 받아들이지 못할까? '청년'이란 단어의 무엇이 나에게 이토록 미련을 남기는 것일까?     


나의 청년 시절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불안'이다. 2, 30대에 나는 불확실성을 온몸으로 떠안고 살았다. 큰 방송국에 매일 출근을 하고 PD들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일해도 방송작가에게는 '사원증'이 아닌 '출입증'을 주었다. 프리랜서로서 매일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는 방송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내가 승부를 걸 것은 실력과 열정뿐이라고 생각했다.      


주말이나 휴일도 반납하며 일에만 매달렸다. 서른이 되기 전까지 해외여행을 가본 적도 없었다. 방송작가가 되고 난 후 여러 번 방송사나 제작팀을 옮겼지만 그 시기가 늘 맞물려 있어 휴식기를 가지지 못했다. 며칠의 휴가를 받아도 언제든 동료들이나 출연자들과 연락이 닿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걱정에 국내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다음 날, 혹은 이듬해를 기약할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늘 초조하고 불안정하던 시기였는데도 나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시절을 그리워해서가 아니다. 시간을 되돌려 20대의 나를 만난다면 나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싶다.      


"내일 너의 자리가 없어질 수도 있어. 하지만 네가 흘린 땀과 고민의 흔적까지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니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며 토닥여주고 싶다. '불안' 또는 '열정'이 청년의 특권이나 특징이라는 세상의 말에 휘둘릴 필요 없다고 속삭여주고 싶다.      


청년의 나에게 꼭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가며, 그 일들을 손에서 놓치지 말 것!'. 전쟁같이 치열했던 20대를 다시 살아낼 자신은 없지만, 그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는 이유는 어떡해서든 좋아하는 일 하나씩은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이 꼭 잘하는 일일 필요는 없다. 청년이었던 나는 춤을 좋아했고, 바느질을 좋아했고, 글을 읽고 쓰는 일을 좋아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지만 나만의 공간에 숨어 느릿느릿한 속도로 좋아하는 일들을 하며 내일을 살아낼 힘을 얻곤 했다.       


마흔이 넘은 나는 여전히 좋아서 하는 일이 여럿 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 일들을 할 수 있을 때 편안함과 만족감을 느낀다. 아마도 좋아하는 일을 하며 설레는 일상을 살고 있어서 "나는 청년이다"라는 착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꼭 생물학적 나이로 청년과 중년, 노년을 구분지어야 할까!     


좋아하는 일 앞에서 설레는 당신이라면, 나는 당신을 청년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 일에 꼭 온몸을 다 바쳐 열정을 다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나의 리듬과 능력에 맞추어 조금씩이라도 이어갈 힘만 있다면, 당신의 하루는 충분히 푸르고 싱그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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