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을 맞이하는 새로운 자세
남편과 나는 식탁에 마주 앉아 집밥을 먹을 기회가 많지 않다. 직업이 지하철 기관사인 남편은 지하철 운행 순서에 따라 매일 출퇴근 시간이 바뀐다. 나 역시 프리랜서다 보니 집을 나서는 시간과 돌아오는 시간이 매번 다르다. 둘 다 일찍 퇴근하는 날이 있어도 여유 시간이 생기면 각자 좋아하는 운동을 하고 오느라 혼자 식사를 하거나 만나서 늦은 외식을 할 때가 많다.
집밥을 연달아 먹는 날은 그나마 명절뿐이다. 우리 부부의 식생활에 걱정이 많은 양가 부모님들은 명절 때만이라도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여야 한다며 작정을 하고 솜씨를 발휘한다.
명절을 앞둔 어느 날, 한밤중에 친정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늦은 시간에는 좀처럼 전화를 하지 않는 분인데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전화를 받았다. 하루 종일 큰 시장에 가서 명절 장을 봤다는 엄마는 다소 들뜬 목소리로 자랑하듯 얘기를 이어갔다.
"내가 정서방 좋아하는 문어도 샀다. 2만 원짜리 사도 되는데 우리 정서방 좋아한다고 일부러 5만 원짜리나 샀다 아이가. 잘했제?”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곁에 있던 남편에게도 통화 내용이 다 들렸나 보다. 옆에서 남편이 작은 목소리로 허공을 보며 속삭였다.
"나 이제 문어 안 좋아하는데. 안 먹어도 되는데."
사실 남편은 명절 음식들을 대부분 좋아하지 않는다.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원재료의 숨이 죽어 있거나 오래 익혀야 맛이 나는 음식, 또는 만든 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버린 음식들을 싫어한다. 나물이나 산적류, 눅눅해진 튀김류 같이 싫어하는 음식을 먹고 나면 몇 시간 동안 소화가 원활하지 않아 고생을 하곤 한다.
결혼 후 시댁에서는 남편의 식성을 잘 아는 어머니가 따로 반찬을 준비해 두니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친정에 가서는 명절에 사위가 반찬 투정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남편에게 그나마 반가운 것이 차례상에 올리던 문어였다. 엄마는 차례를 지내고 난 후 살짝 얼린 문어를 얇게 포를 떠 상에 올렸다. 시골에서 가져온 참기름에 소금을 약간 쳐서 아직 얼음이 맺혀있는 문어를 찍어먹으면 입 안 가득 신선하면서도 쫄깃한 맛이 퍼져 나갔다. 사위의 젓가락이 어딜 향하나 눈여겨보던 엄마는 다른 반찬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문어만 먹는 것을 확인하고는 명절 때마다 문어를 빼놓지 않았다.
문제는 남편이 문어를 특별히 좋아했다기보다는 싫어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사람의 입맛만큼 종잡을 수 있는 것이 어디 있으랴.
어렸을 때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음식을 이제는 너무 달고 자극적이어서 싫어할 수도 있고, 고기를 무척 좋아했으나 어느 날부터 고기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리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나 역시 대학생 때 이틀에 한번 꼴로 찾아갔던 김치찌개 집을 얼마 전 다시 방문해 먹었더니 이제는 맵고 짠맛이 강해 다시 찾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명절 때마다 문어를 먹어야 했던 남편의 입맛이 변했다 해도 그 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수산 시장을 돌며 잘 생기고 싱싱한 문어를 고르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엄마의 마음도 잘 알 것 같았다. 아직 아내는 가족의 식사를 책임져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사 먹는 밥보다 집밥이 훨씬 건강하다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엄마로서는, 딸이 바쁘다는 핑계로 사위의 식사를 챙기지 않는 것이 못내 미안하고 아쉬운 눈치다. 그러니 명절 때만이라도 신선한 재료로 잘 챙겨 먹이고 싶은 게다.
대놓고 "장모님! 이제 문어는 먹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남편도, 이번 명절에는 무엇이 먹고 싶은지 물어보지 않고 음식 준비에 아끼던 쌈짓돈을 꺼내 쓴 엄마도 문제라면 모두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서가 아닐까.
가족과 친척들이 오랜만에 모이는 명절은 즐거움이 가득해야 하지만, 실제 명절 연휴는 스트레스가 쌓이는 시간으로 전락하기 쉽다. 여러 사람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오고 가는 말 중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거나 크고 작은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야기꽃을 피우려다 이야기 총이 서로의 가슴에 박히게 된다고나 할까.
과거의 추억을 소환하거나 미래의 계획을 물어보다가 탈이 나는 경우가 많다. 옛날엔 공부를 잘했는데 이렇게 안 풀릴지 몰랐다거나, 어릴 땐 예쁘고 순했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말도 예사로 건넨다. 앞으로 취업은 어떻게 할 것인지, 결혼은 할 생각이 있는지, 아이는 왜 갖지 않는지. 가족, 친지라는 혈연관계를 내세워 상대의 미래를 마음대로 재단하는 질문을 쏟아 낸다. 명절이 마냥 기쁘지 않고 기다려지기보다는 피하고 싶은 기간이 된 이유는 이런 질문들에 정해진 '모범답안'들을 할 수 없거나 하기 싫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상당 부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온 가족이 모이기 힘든 이때, 명절이라는 귀한 시간을 서로의 참모습을 알아가고 이해하는 시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우선 이번 명절은 "요즘은 어떤 음식을 좋아해?"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려 한다.
결혼 초, 시어머니는 나에게 옥수수와 참외를 좋아한다고 귀띔해 주셨는데 이와 잇몸이 불편해진 이후에는 오히려 꺼리는 대상이 된 듯하다. 입맛이 없을 때마다 멍게를 찾던 친정엄마는 장염으로 호되게 고생한 후 회나 조개류를 멀리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하나뿐인 남동생이 멸치육수를 기본으로 하는 음식들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40년 만에 처음 알게 되어 충격을 받기도 했다. (어릴 때 분식집을 했던 우리 집은 늘 멸치국수가 넘쳐났고, 그래서 모든 음식의 베이스는 멸치육수였다. 그 맛에 길들여진 나는 지금도 멸치육수를 제일 좋아한다.)
"요즘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가벼워 보이고 뜬금없어 보이는 이 질문은 사실, ‘해마다 일정하게 지키는 날로 즐기거나 축하하는 날’이라는 명절의 의미를 되찾게 해주는 작은 통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가족이라도 잘 모르는, 아니 가족이라서 더 지나치기 쉬운 '취향'에 대해, 그리고 '현재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이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많은 말을 하기보다는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기회가 더 많아질 테고, 기억 속의 가족 혹은 기대하는 가족의 모습이 아니라 진짜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가족의 모습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