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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의 판타지

내가 상상하던 장면이 현실이 되는 순간!

by 김주미

당신은 현실에서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막연히 그려보는 환상이나 판타지가 있는가?

말하자면 연애나 결혼에 관한 환상이나 행복한 가정, 성공한 직장 생활하면 떠오르는 장면 같은 것도 좋다. 평소 목욕을 좋아해서 매일 목욕탕을 찾는 나는 온천욕에 관한 환상을 몇 가지 품고 있다.


결혼 전, 남편은 프러포즈를 하면서 자신에게 바라는 점이 있느냐고 물었다. 평소 배우자나 결혼생활에 대해 꿈꿔온 모습이 있다면 말해보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겠다고 의지를 내비쳤다.


가끔 남편과 그때를 떠올리곤 하는데 남편은 내 대답에 당혹감을 느꼈다고 회상한다. 경제적 안정감이나 취향이 깃든 집, 부부가 함께 떠나는 여행 같은 것을 기대했는데 나의 요구가 자신의 예상을 빗나간 것이라 적지 않게 놀랐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결혼 전 내 삶의 최우선 순위는 가족이었다. 그때는 엄마와 남동생이 내 세상의 중심이었다. 그런 내가 배우자와 함께 하는 삶을 그리며 꿈결에서 본 장면처럼 막연히 그려온 영상 하나가 있었다.


“난 오빠가 결혼해서 가끔이라도 민재와 목욕탕을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 가서 서로 등도 밀어주고, 바나나 우유도 마시면서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두 남자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싶어.”


남동생은 여섯 살까지 여탕을 다녔다. 동생이 세 살 되던 해 아빠가 돌아가시고 남탕을 데려갈 사람이 없으니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턴가 동생이 목욕탕에 가기 싫다며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영문을 알 리 없던 엄마와 나는 어르고 달래기를 반복했지만 그렇게 목욕탕에 데려가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탕 근처에는 오지도 않았다.


나중에 동생에게 들은 사실인데, 동생은 어느 날 같은 유치원에 다니던 여자 아이를 목욕탕에서 만났고 그날 이후 부끄러워 목욕탕 가기가 정말 싫었다고 한다. 자라면서 동생은 남탕을 늘 혼자 다녔다. 목욕탕 앞까지 셋이서 함께 와도 남탕과 여탕으로 나누어 들어가야 했고, 혼자 목욕가방을 들고 털레털레 걸어가는 동생의 뒷모습이 늘 안쓰러웠다.


남자들은 아버지가 되어 아들과 단둘이 목욕탕에 가는 꿈이 있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들었다. 동생은 그와 반대로 아버지 같은 남자 어른과 온천욕을 즐기고 싶을 것이라 막연히 짐작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니지만, 내가 만약 결혼을 한다면 매형과 나란히 목욕탕으로 향할 수 있게 해 주리라 다짐했다. 목욕탕이라는 공간이 동생에게 더 이상 소외나 결핍을 느끼는 공간이 아니기를 바랐다.


이야기를 다 들은 남편은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며 꼭 이뤄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환상, 아니 나만의 판타지는 쉽게 이뤄지지 못했다. 신혼 때는 동생이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니 두 남자가 자주 마주칠 일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동생도 결혼을 하고 부산에서 자리를 잡았지만 요리사가 직업인 동생은 주말이나 명절에 더 바빴고, 한가롭게 매형과 목욕을 즐길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동생이 자기 가게를 차리고 여유를 갖게 된 후에야 두 남자의 목욕 동행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찾아왔다.

명절 전날, 드디어 친정에서 남편과 동생이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게 된 오후였다.


“처남, 우리 목욕이나 갈까?”


“네? 목, 목욕요?”


“응. 결혼 전에 누나한테 소원 있으면 얘기하라니까 내가 처남이랑 목욕탕 같이 가주는 게 소원이라고 하더라고. 처남도 목욕탕 가는 거 좋아할 거라고 하던데? 가서 둘이서 세신도 하고 좋잖아, 같이 가자!”


동생은 곤란한 부탁이라는 듯 귀까지 붉어지더니 어렵게 입을 뗐다.


“저, 근데요, 매형! 저 때문에 일부러 가는 거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저 사실 목욕탕 가는 것 안 좋아해요. 답답하기도 하고, 남이 때 밀어주거나 다른 사람 손이 제 몸에 닿는 것도 별로이고요. 누나가 절 잘 몰랐나 봐요.”라고 말하며 동생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두 남자가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이 어색한 상황을 어떻게 할 거냐며 따지는 눈빛이었다. 그날 이후 남편에게도, 동생에게도 둘이 사이좋게 목욕을 가라는 권유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목욕탕에 얽힌 이루지 못한 나의 환상은 또 있었다. 결혼 14년 차, 아이 없는 삶이 주는 평온함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사는 나는 주위의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안정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 아주 가끔, 일 년에 한 번꼴로 ‘나도 아이가 있었으면’하는 생각이 불쑥 들 때가 있는데 바로 목욕탕에서다.

온탕에 앉아 반신욕을 하다 유독 다정해 보이는 모녀를 발견하는 순간, 내 눈길이 멈춘다. 딸은 엄마에게 평생 친구 같은 존재라고들 말한다. 나이를 불문하고 엄마와 딸이 나란히 앉아 서로 눈을 마주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탕 안 온도보다 더 마음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정경이다.


‘지금은 어리지만, 저 딸은 자라면서 엄마와 같이 계속 목욕탕을 찾을 테고 엄마는 딸의 학창 시절, 연애담, 직장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잘 들어주는 벗이 되겠지.’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살짝 서글픔이 찾아온다. 곁에 아무도 없이 백발이 된 내가 혼자 탕 안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딸과의 목욕은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한 나에게 결코 이룰 수 없는 꿈같은 장면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평소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그 순간을 체험할 기회가 생겼다. 엄마와 남동생 가족과 함께 온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남동생의 딸이자, 나의 어여쁜 조카는 아홉 살 난 여자아이, 나도 드디어 딸과 목욕하는 로망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며칠 전부터 설레며 그날을 기다렸고, 엄마와 올케는 마치 나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듯 조카와 나만 온천탕 앞에 남겨두고 각자 볼일을 보러 갔다. 엄마는 한증막으로, 올케는 수영장으로 향했고 조카는 온전히 내 차지가 되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탕 안으로 들어간 나는, 조카의 손을 이끌고 거침없이 온탕으로 향했다. 탕 앞에 이르러 발을 살짝 담가본 조카는 화들짝 놀라며 들어가지 않겠다고 물러섰다. 조카는 말했다.


“고모, 나 뜨거운 물 싫어해요. 너무 뜨거운 데 들어가면 피부가 빨갛게 되거든요. 나 안 들어갈래요.”


“어? 그, 그래. 알았어. 그럼 미지근한 물은 괜찮지? 저기로 가볼까?”


난 얼른 미온수가 흐르는 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카의 예민한 온도 테스트를 통과한 후 우리는 같이 탕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카와 나란히 적당한 온기가 흐르는 물속에 몸을 담그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조카가 좋아하는 게임 이야기, 반 친구들 이야기, 최근에 읽은 책 이야기까지 조카가 좋아할 만한 화젯거리들을 꺼내며 이야기를 이어가려던 중, 조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고모, 나 화장실 가고 싶어요.”


“어? 화장실? 그래, 잠깐만. 화장실이 어디 있더라.”


우왕좌왕하며 화장실을 찾았고 볼일을 보고 나온 조카는 답답하다며 그만 씻고 나가자고 했다. 반신욕을 제대로 하지 못해 몸이 덜 풀린 상태였지만 별수 없었다. 조카와 함께 샤워부스로 향했고 거기서 나는 또 한 번 당황한 몸짓을 이어갔다.


머리카락이 긴 조카가 샴푸를 할 때 옆에서 도와줘야 했지만, 내 머리 말고는 누구를 감겨준 적이 없던 나의 손길은 계속 움찔거렸다. 다 씻고 나와서는 젖은 수건과 옷, 장난감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용 로션을 어렵게 찾아 발라주고 머리를 말리고 목이 마르다는 아이의 입에 우유까지 물리고 나서야 비로소 내 젖은 몸을 닦을 수 있었다.


때마침 탈의실에서 만난 올케와 엄마는 내 모습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형님, 온천 하러 들어갈 때보다 더 퀭해져서 나오네요.”


“그러게, 너희 시누이가 애 하나 목욕시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이제야 알았나 보다. 얼이 빠졌다, 얘. 하하하!”

목욕에 얽힌 나의 환상은 이렇게 매번 와르르 깨지곤 했다. 꿈은 그저 꿈으로 남아있을 때 더 아름답다고 했던가. 멀리서 봤을 땐 아름다워 보이던 광경이 가까이서 보니 헛된 망상이었거나 결코 아름답지 않은, 고단하고 어색한 장면의 연속이란 사실을 깨달았다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나는 또 목욕에 관한 환상을 키워가고 있다. 가족과의 온천은 충분히 체험했으니 이번엔 나의 오랜 벗들과 따뜻하고 아늑한 시간을 꿈꾼다. 우리가 지금처럼 함께 나이 들어가다 쉰이 넘고, 예순이 넘어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면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비롯해 유럽의 온천도시들을 돌며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말이다.


지금으로선 이뤄지기 힘들 것 같은 여행이지만, 그리고 막상 현실로 닥친다면 실망이 클 수도 있지만 나는 계속 몽상을 이어갈 것이다. 목욕탕은 소중한 내 사람들과 온기를 나눠 가질 수 있고 나의 속살과 속내를 용기 내어 드러낼 수 있는 은밀하고 다정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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