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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Oct 29. 2020

진짜 나의 글을 쓰고 싶어서

나의 세상을 만드는 기쁨


글쓰기를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한 무렵을 기억한다.


열일곱 소녀는 외로웠고 허기졌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2시까지 밥벌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엄마에게, 무리 지어 다니지만 진짜 속마음을 내비치면 나를 멀리할 것 같은 친구에게 건넬 수 없는 말들이 쌓여가던 어느 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나에게 결핍을 어루만져주는 어른이었고,

볼썽 사납게 감정을 토해내도 도망치지 않고 곁을 지키는 벗이자 연인이었다.


글을 쓰며 돈을 버는 삶을 살겠다는 야무진 각오로 스물셋에 방송작가가 되었다. 일 년, 이 년, 삼 년…… 시간을 버텨내며 ‘이게 아닌데’라는 감이 왔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오늘만 참으면 내일은 나아질 것이란 야속한 희망들이 자꾸 발목을 붙잡았다.


매일 썼지만 진짜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은 뒤로 숨기고 동료들과 대중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입맛에 길들여졌다.  


글을 쓰면서도 글을 쓰고 싶다는 갈증을 참을 수 없을 때쯤 대학원에 진학했다. 지식이라는 힘을 가지면 펜 끝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을 줄 알았다. 지면에 그동안 못다 한 수다를 쏟아내듯 나의 생각과 주장들을 쉴 새 없이 읊조렸다.


그러나 이름 있는 지성인을 인용하지 않은 글, 유행하는 이론을 따르지 않는 글은 곧잘 가치 없는 글로 치부되었다. 심사라는 절차로, 때론 발표나 토론이란 형식으로 글을 평가하던 사람들의 눈에 들기 위해 글을 재단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점점 지적받지 않는 글을 쓰는 법을 익혀갈 때쯤 나의 글에 겉멋과 기름기가 잔뜩 끼었음을 발견했다.

잘나 보이는 글이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나의 못남이, 보잘것없는 밑천이 여실히 드러나는 글이었다.

학술지에 실리고 저자란에 이름 세 글자를 새긴 어엿한 내 글이지만 타인의 생각을 조각조각 이어 붙인 너덜너덜한 쓰레기에 불과했다. 나는 나의 글이 싫었다. 나는 진짜 내 글을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다.


어느 날 훈장처럼 책상 아래에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글 뭉치들을 미련 없이 버렸다. 4년 전, 그렇게 글쓰기를 향한 이십여 년의 방황을 마쳤다.


용기 내어 진짜 나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다짐한 날을 기억한다.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글을 쓰기로 했다.

성장이란 허울에 가려 불행을 불행 인지도 모르고 버틴 날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 온몸으로 실패를 껴안아야 했던 시간들을 종이 위에 옮기며 과거의 못난 나를, 부끄러운 글쓰기의 시간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제야 진짜 글쓰기를 하고 있다며 안도할 무렵,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스스로를 돌보고 위로하려 쓴 글인데 어느 날부터 독자가 생기고 나의 글을 ‘우리의 글’로 만들자며 손을 내밀어주는 출판 편집자들을 만났다.  


열일곱에 처음 만났던 치유의 글쓰기 시간과 재회했고, 모자란 글들을 모아 책으로 엮는 놀라운 과정을

경험했다.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나를 지키며 읽고 쓰는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그리고 나의 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도.


지금은 글쓰기가 주는 충만함을 혼자 누리기 미안하여 글쓰기 수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글쓰기 수업이라고 하지만 사실, 놀이터에서 여럿이 어울려 ‘글’이라는 장난감으로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글쓰기 모임이다. 느슨한 연대 속에서 나도, 학인들도 그저 글벗이란 관계로만 서로를 정의할 뿐, 서로의 글을 평가하거나 재단하지 않는다. 글을 쓰며 매일 새로워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격려할 뿐이다.


오늘도 글쓰기라는 연인, 글벗이란 동행자들과 재회하는 시간을 설레며 기다린다. 어쩌자고 이제야 만났냐며 탄식과 기쁨의 소리를 지르면서.  




"나는 침묵에서 시작했다. 읽을 때만큼 조용하게 글을 썼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내가 쓴 것을 조금씩 읽었다. 몇몇 독자들이 나의 세상으로 들어오거나, 나를 그들의 세상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침묵에서 시작했지만, 결국엔 긴 여정을 거쳐 아주 멀리서도 들리는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에 이르렀다."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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