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소개를 해 주세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당신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냐고 나에게 묻곤 한다.
직업의 세계에 들어온 지 23년 차. 이제는 망설임 없이 나를 소개해야 할 텐데 여전히 한 마디로 나를 정의하지 못하고 대답을 고르느라 주저한다. 현재 내가 ‘업(業)’으로 삼고 있는 일이 여러 개이니 무엇을 가장 먼저 말해야 할지 선택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다.
돈을 가장 많이 벌어다 주는 일은 연구이지만, 지금도 대학과 연구소에서 전업으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연구자라고 말하기엔 스스로 부족함을 느낀다. 강연가라고 불리기엔 강사들의 꿈의 무대라는 ‘세바시(세상을 바꾼 시간 15분)’ 같은 무대에 선 적이 없으니 물어보는 이가 갸우뚱할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고, 앞으로도 지속하고 싶은 ‘작가’라는 직업은 네 권의 책을 냈음에도 밥벌이 면에서도, 유명세 면에서도 제일 마지막 순위로 밀려나 있으니 자신 있게 내세우지 못한다.
나를 간결하게 한 문장으로 소개할 방법이 없을까를 오래도록 고민했다. 요즘 ‘N 잡러’가 유행이라지만 생각이 깊어질수록 내가 걸치고 있는 모든 분야에서 아직 미완의 존재라는 점만 선명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나의 ‘일의 역사’를 천천히 곱씹어 보다 보면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내가 가진 일의 절반은 ‘말하기 위한 글’을 쓰는 작업이었다. 처음 십수 년은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진행자나 성우들이 말할 내용을 쓰는 방송작가로 일했다. 어쩌다 대학 강사가 되어서는 내 머릿속 지식을 학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강의안을 쓰는 데에 오랜 시간을 공들였다.
나에게 주어진 나머지 업(業)은 ‘글로 옮길 말’을 이끌어내고 선택하는 일이었다. 각 분야의 전문가나 연구 대상자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들이 말한 내용을 다듬고 분류하여 문자로 옮겼다. 때론 인터뷰집이란 이름으로, 때론 보고서나 논문의 형태로 내가 듣고 고른 말들을 지면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20년 넘게 말과 글이라는 섬 사이를 수없이 오갔다. 빠른 항로를 알려주는 지도도, 믿고 뒤를 따를 이도 없었기에 치열한 직업의 세계에서 헤매지 않을 나름의 뱃길을 스스로 찾아야 했다. 그 길을 나만 안다고, 누구보다 빠르고 매끈하게 달려갈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나는 말과 글 사이를 건너며 셀 수 없이 많은 실수와 실패를 겪었다. 그래도 도망가지 않고 버티며 여전히 말을 하고 글을 쓰며 나의 직업인으로서의 가치를 잃지 않았다. 그동안 일을 하며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나만의 방법과 작지만 유용한 도구들이 나를 지켜주었다. 이제는 나만의 소소한 노하우들을 다른 이들에게 공유할 수 있을 만큼은 자랐다.
내 주위에는 유난히 강사들이 많다. 대학의 강의평가에서 내내 1등을 놓치지 않는 인기 교수부터, 영화 인문학처럼 방대한 분야를 연결하여 대중에게 알기 쉽게 알려주는 내공이 꽉 찬 강사, 초등학생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한 세대를 사로잡는 스피치 실력을 가진 교사까지. 그들의 말하기 기술은 늘 나의 감탄과 부러움을 자아낸다. 그런 그들이 나를 만나면 산타에게 소원을 말하는 어린이 마냥 간절한 눈빛으로 이야기한다. 자신이 강의하는 내용을 글로 쓰고 싶다고,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싶다고. 그러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며 글쓰기란 벽의 끝이 한없이 높아 보여 넘어갈 엄두를 낼 수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대학원 시절에 만난 선후배들 중에는 발표문과 논문으로 생각과 주장을 펼칠 때에는 막힘이 없지만, 사람들 앞에서 그 내용을 말할 때에는 세상에서 가장 작고 볼품없는 존재처럼 움츠리는 이들이 있다. 나보다 뛰어난 글을 쓰는 동료 작가들 가운데는 홍보를 위해 북 토크를 하거나 글쓰기 강의를 하는 시간이 제일 곤욕스럽다며 힘들어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과 만나면서 나는 자주 생각했다. 그럼 나는 언제부터 말과 글 사이를 오가는 일이 그리 힘에 부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되었을까. 나아가 어떻게 즐겁고 보람 있는 순간이라고까지 느낄 수 있었을까.
고백하자면, 요즘의 나는 말을 글로 옮기고, 혹은 글을 말로 전환하는 과정이 꽤 재미있다고 느끼고 있는 참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을 리 없다. 지금도 나는 글을 퍽 잘 쓰는 작가도, 청중을 휘어잡는 달변가도 아니다. 나 역시 ‘말을 글로 바꾸기’ 혹은 ‘글을 말로 전하기’라는 과업 앞에서 때론 막막하고 때론 도망가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과 글 사이를 제법 잘 건너갔을 때는 생동감 있는 언어를 구사하며 청중과 독자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는 성취감에 짜릿함을 느낀다. 말과 글은 나를 표현하는, 나의 세계를 이해시키는 가장 매력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나란 사람을 이렇게 소개할 작정이다.
“저는 말과 글을 잇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말과 글의 건널목 한가운데 서서 둘 사이를 어떻게 연결하면 좋을지 애를 태우는 하루를 보낸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도록 안전하게 그리고 서로의 진심을 알 수 있도록 곧바르게 내가 가진 지식과 생각,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글과 말은 나를 나 자신이게 만들어 주고, 내가 세계를 이해하는 창이 되어준다. 그 사이를 오가는 일은 앞으로 삼, 사십 년은 계속 새롭고 즐거울 것 같으니 나의 평생 직업으로 삼아도 손색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