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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Oct 29. 2020

손길 가는대로 내버려두기

낙서장


글쓰기 수업이나 강연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단골 질문이 있다.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생각은 많은데 문장으로 옮기려면 막막해요.”


작가인 나도 누군가에게 되묻고 싶다.

글쓰기의 부담감과 두려움을 떨쳐 낼 명쾌한 해법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죽하면 작가들은 전생에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겠는가.

마감을 앞두고 글감이나 주제가 떠오르지 않아 막막함에 머리를 쥐어뜯는 경험을 매번 한다. 노트북 모니터 속 커서의 깜박임에 쫓겨 손톱을 물어뜯고 다리를 덜덜 떨고 있을 때면 이미 마음 안은 지옥이다.


적어도 내가 만난 글쟁이들 중에 “글쓰기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단언하거나 “마음만 먹으로 일필휘지로 쓸 수 있지요.”라고 큰소리치는 사람은 없으니 나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그럼 작가들은 글의 문을 어떻게 열까?


나의 경우엔 이렇다. 일단 노트를 꺼낸다. 이때는 노트의 밑줄조차 생각의 흐름을 막아설 수 있으므로 줄이 없는 백지가 좋다. 그리고 펜을 든다. 글감을 떠올릴 때 나는 주로 연필을 쓴다. 볼펜이나 만년필로 쓰면 너무 선명한 자국이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마음속, 머릿속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무언가를 연필심으로 흘려낼 때 뭐든 써도 괜찮다는 안도감이 생긴다.


연필과 노트가 준비되었다면 이제는 아무 말이나 쓰기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단어들은 ‘새벽’, '일출’, ‘허기’, ‘신호등’, ‘버스’, ‘운동장’, ‘우리 동네’, '춥다’, ‘시리다’, ‘아름답다’, ‘부지런하다’와 같은 것들이다. 어느 정도 쓰고 난 뒤에는 내가 쓴 단어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학창 시절 우리에게도 순간 몰입력이란 게 있음을 증명했던 ‘매직아이’를 대하듯이!


글자가 힘들다면 그림으로 표현해도 좋다. 스치듯 지나가는 이미지를 붙잡아 그림으로 옮긴다.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기괴한 형상이라도 상관없다. 장난치듯 아무렇게나 옮겨놓은 단어나 이미지들을 우리는 낙서라고 부른다.


글을 쓰려면 낙서의 힘을 믿어야 한다. 낙서들을 이어가다 보면 착한(?) 작가에게만 보이는 희미한 선이 나타날 것이다. 많은 명사와 동사들 중 나에게 의미 있는 단어들이 서로 짝을 짓고 연결되어 하나의 생각 덩어리를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전생에는 큰 죄를 지었을지 몰라도 현생에서 쌓은 작은 덕들이 모여 ‘영감’으로 당신 앞에 나타나는 순간이다.


영감을 얻는다는 것은 그리 신성한 일도, 특별한 순간도 아니다. 영감의 또 다른 말은 자극이 아닐까. 매일 반복해서 맞이하는 아침 풍경도 어느 날 나에게 보통 때와 다른 자극으로 다가와 쓰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이 바로 글감이 될 수 있다. 만약 지금 글 한편을 새로 써야 한다면 앞서 끄적인 낙서들을 모아, 일출의 순간만큼 아름다운 아침 풍경으로 빈 도로 위를 달리는 버스와 새벽 버스에 올라타는 부지런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글의 시작을 열지 못해 망설이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낙서할 준비를 하자. 당신이 좋아하는 종이를 선택하고 영감의 꼬리를 자르지 않도록 어깨에 힘을 뺀 후 펜을 쥔 손의 움직임에 몸의 리듬을 맡기면 될 일이다.



"내게 일기 쓰기란 이삭줍기와도 같다. 수확이 끝난 밭을 산책하며 바닥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 담듯, 나는 그날 하루의 일들을 일기에 모은다. "

 - 수전 티베르기앵, <글쓰는 삶을 위한 일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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