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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Oct 29. 2022

당신을 작가답게 만드는 마법의 망토

작가의 변신술 


어릴 때 어른의 옷 입기를 좋아했다. 혼자 있을 때 엄마나 이모의 옷장을 몰래 열어보는 것이 나만의 비밀 놀이였다.


크고 두툼한 어른 외투를 꺼내 내 어깨에 걸치고는 거울 앞에서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포즈를 취했다. 어깨선은 한없이 내려가고 팔은 길어 내 손가락 끝이 이내 사라져 버리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어린 내 눈엔 거울 속 모습이 꽤나 멋있어 보였다. 어른의 옷을 걸칠 때면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이 부담이 아니라 내가 강해졌다는 자신감으로 다가왔고, 마법사의 망토처럼 나를 어른들의 세계로 데리고 갈 것만 같았다.


평소엔 숫기 없고 내성적이던 나이지만 어른의 옷을 걸치는 순간만큼은 다른 존재로 변했다. 무대 위에 선 배우나 모델처럼 몸짓은 당당했고 걸음걸이엔 거침이 없었다.   


어른들의 옷을 몰래 입어보며 멋을 부리던 시간들이 나만 알고 있는 일탈의 순간인 줄 알았다. 시간이 흘러 내가 20대가 되었을 때, 엄마와 이모는 가족 모임에서 각자 자녀를 키우며 경험한 의외의 순간들을 회상했다. 남동생이 무뚝뚝한 줄 알았는데 초등학교 때 여학생들에게 자상한 친구로 인기가 많아 놀랐다는 이야기, 사촌이 집에선 늘 까불고 응석만 부려 걱정이었는데 또래들 사이에선 의젓한 리더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 등등.


마침내 나의 순서가 되었을 때 엄마와 이모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듯 “주미도 어릴 때 놀라게 한 적이 많지.”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얌전하던 아이가 가끔 혼자 방에 남겨질 때면 모델처럼 워킹을 하거나 거울을 보며 춤까지 추길래 그 모습이 귀엽고 신기해서 몰래 방문이나 창문 틈으로 한참을 지켜봤노라고.  


어른이 되어서야 나만의 비밀 놀이가 사실은 숨은 관객들이 곳곳에서 지켜보던 공개 쇼였단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짝사랑을 들킨 소녀처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괜스레 “내가? 몰라! 난 기억도 안나.”라고 투덜거리며 그 자리를 피했다.


어른의 옷은 어린 시절 수줍음이 많고 용기가 부족하던 나를 상상 속에서 동경하던 멋진 인물로 바뀔 수 있게 용기를 준 변신술의 도구가 아니었을까.


일상에서 글 쓰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야 할 때, 내 몸과 마음 상태가 기능에 맞게 전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옷들을 나는 종종 ‘작업복’이라 부른다.

 

작가로서 내가 선호하는 작업복의 최우선 가치는 ‘편안함’이다. 옷감의 재질이나 사이즈에서 불편함이 있으면 글쓰기에 몰입을 방해한다고 생각해서 상의는 부드러운 면이나 따뜻한 니트 소재를 고른다. 하의는 일명 ‘고무줄 바지’처럼 허리나 품이 넉넉해 앉아서 오랜 시간을 있어도 배나 다리가 쪼이지 않는 디자인을 선호한다.


연단이나 무대에 서서 말을 해야 하는 강연가의 위치에서 선택하는 작업복은 사뭇 다르다. 내가 스스로 아랫배에 힘을 주지 않아도 나의 코어를 단단하게 잡아줄 탄탄한 허리 밴드를 가진 하의를 고르고, 상의는 내 몸이 불편하더라도 보이는 사람에게 단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셔츠나 어깨가 각진 슈트 형태의 옷을 입는다.  

 

만약 오전에는 강의를 하고 오후에는 글쓰기에 집중해야 하는 일정이라면, 마음가짐만으로 충분치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땐 번거롭더라도 가방 안에 부드러운 카디건 같은 여분의 옷을 하나 더 챙긴다. 강의가 끝나고 카페를 작업실 삼아 글을 쓸 때, 재킷을 벗어놓고 카디건을 꺼내 입으면 나만의 ‘작가 코스프레’가 시작되는 셈이다.


물론 입는 옷 따위에 상관없이 자신의 역할을 때와 장소에 맞게 바꿀 수 있는 전천후의 사람이라면 이런 방법은 우습고 귀찮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의지가 약하고, 멀티 플레이어로서 타고난 재능이나 체력이 없는 자가 그런 위치에 있다면 소소하지만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피너츠>에서 찰스 브라운의 친구 라이너스가 늘 들고 다니는 애착 담요처럼, 나만의 작업복들을 입으면 세상을 향해 글을 쓰고 말을 할 때 혹여 실수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을 덜어낼 수 있다. 평소 내가 선망하던 작가들처럼 주어진 임무를 기한 내에 멋지게 처리할 것이란 용기와 자신감을 주기도 한다.


당신에게는 책상 앞에 앉은 당신의 마음가짐을 ‘작가답게’ 만들어줄 마법의 도구가 있는가? 없다면 이번 기회에 주위에서 유치하다고 놀림을 받을지라도 하나 장만하시길 추천한다. 부끄러움은 잠깐이지만, 그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고 오래갈 테니까.   


“나는 그 배역에 대해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옷을 입는 순간, 의상과 분장은 마치 내가 그 인물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해 주었다. 나는 그 인물을 알아가기 시작했고, 무대에 올라서는 순간 내 안의 그는 완전한 인물로 태어났다.” - 찰리 채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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