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정화하는 능력

by 별하열음

얼마 전에 맨발 공원에 처음 보는 고양이가 어떤 여자와 함께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고양이가 산책도 다하네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 고양이를 또 만났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귀여워하며 한 번씩 관심을 주고 갔다. 어떤 분은 자신이 가진 먹을 것을 조금 내어 주며 고양이가 먹는 모습을 한참 보고 갔다. 그런 고양이를 기구 운동을 하며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고양이가 배가 많이 고팠던 것 같은데 나도 뭐라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은 귤 하나, 야채 가게에서 사 가지고 온 토마토가 전부였다. 혹시나 해서 고양이 집사 고동이이게 물었더니 절대 안 된다고 사료 외에는 아무거나 먹이면 안 된다고 했다.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던 아주머니가 가시고 고양이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호기심에 고양이와 소통하고 싶어서 고양이가 간 방향으로 다가가 “야옹~” 소리를 냈다. 나는 꽤 고양이와 비슷한 야옹 소리를 낸다고 자부한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예전에는 무서워했는데 주변 지인들의 강아지, 고양이와 잠시 놀아 보니 내가 경험이 없어서 그렇지 동물을 싫어하거나 생각보다 많이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정을 주기 시작하면 한없이 예뻐했다. 예전에 동생이 여행을 간다고 해서 동생이 키우는 고양이를 1주일간 키운 적이 있다. 그때도 사실 무서워서 안거나 잘 다루지는 못했지만 얼마나 예뻐했는지 모른다. 이름은 ‘여르미’ 개냥이인데다가 정말 예쁘게 생겨서 출근할 때 물끄러미 쳐다보면 데리고 가야 하나 할 정도로 귀여운 짓만 했다. 그때 그 경험으로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여전히 가서 만지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고양이가 지나가면 시선이 가고 소통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번에도 “야옹~” 소리를 내며 그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이 소리에 고양이들이 호기심을 갖고 반응을 했으므로 당연히 통하리라 생각했다. 다른 고양이들은 이 소리를 내면 ‘저거 뭐지?’하는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어떤 고양이는 나랑 하울링 하듯 야옹 화음을 넣기도 했었다. 그때 내가 진짜 고양이의 언어를 말하고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야옹~” 하자 맨발 공원에서 만난 고양이가 가던 길을 멈추더니 나에게 달려온다. 너무 반갑다는 듯이 강아지마냥 내게 다가오는데 당황해서 도망갔다. 그랬더니 고양이가 내가 가는 쪽으로 따라오고 정자 위로 걸 터 앉아 올라가니 이번에는 정자 위로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으아아아 미안...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이렇게 적극적인 길냥이는 처음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했고 그 고양이와 거리를 두고 대치를 했다. 고양이는 내가 도망가자 그 자리에서 계속 울었고 뭔가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더니 사람이 보이기만 하면 그곳으로 달려갔다. 마치 도움을 요청하는 고양이처럼.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얼마 전에 보았던 사람과 산책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누군가 키우는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의 곁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고양이였던 것이다.

겨울이라 날씨는 춥고 배도 고플 테고 나 좀 데려가요 하듯이 고양이가 우는 듯했다. 당장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줄 수 있는 먹을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자 희망고문을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책임질 수 없으면 마음도 내어 주면 안 되는 상황도 생기기 마련이다. 고양이 집사 고동이가 아무래도 그 고양이는 사람 손을 많이 탄 것 같다고 사람 손을 많이 타면 이용당하기 쉽다는 말까지 했다. 위험에 놓여질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고양이의 다가옴에 도망간 나는 미안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기대를 하는 마음에 선을 그어주는 것도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 기대했지만 돌아오는 것이 없으면 그것 또한 상처가 될 테니까. 그래도 추운 겨울에 맛있는 밥은 마주치면 주고 싶었다. 다시 가방에 고양이 밥과 간식 그리고 물을 챙겨 다니기로 했다.


그 고양이 밥과 간식의 첫 번째 주인공은 내가 작년 여름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검은색 고양이 “묘묘”였다. 새까맣고 눈이 신비롭게 생겨서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에 나왔던 검은 고양이와 닮았다고 생각했고 내가 “묘묘”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물론 묘묘는 자기가 묘묘인지 모른다. 나 혼자 내적 친밀감을 두며 묘묘가 지나갈 때마다 시선을 두었으니까. 묘묘는 지난번 그 고양이와는 다르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은 분명히 있는 것처럼 잠시 멈추어 보는데 다가오지는 않고 올 듯 말 듯 하다가 자기 갈 길을 간다. 맨 처음 가방에 고양이 밥과 간식을 넣어 다녔던 것은 묘묘 때문이었다. 묘묘 주려고 넣어 다녔는데 묘묘를 보기도 어렵고 처음에 간식을 몇 알 줬는데 경계하더니 그냥 가버렸다. 여름과 가을에 간간이 만나던 묘묘를 때마침 보게 되어 가방에서 고양이 밥과 간식을 들고 달려가서 “묘묘야 맘마 주께 맘마” 하며 멀찍이 서서 고양이 밥을 흔들어 보였다. 묘묘가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쪼그리고 앉아 작은 그릇에 고양이 밥을 짜고 있으니 묘묘가 멀찍이 떨어져서 그런 나를 보고 있다. 나 또한 고양이 밥을 놓아주고 멀찍이 떨어졌다. 왜냐하면 묘묘는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고 내가 다가가면 도망가려고 했기에 적정 거리를 두고 밥을 먹게 했다. 내가 자신에게서 일정 거리를 떨어져 있어 주자 다가와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것도 밥그릇에서 얼굴도 떼지 않고 아주 잘 먹어서 나는 행복했다. 간식을 줄 때도 물을 줄 때도 묘묘는 경계를 하고 도망쳤다. 내가 간식과 물을 놓아주고 다시 멀찍이 서 있으면 그제야 다가와 다시 간식과 물을 맛있게 먹었다. 나는 왜인지 묘묘와 나 사이에 이 거리감이 좋았다. 동물을 다루는 것에 서툴고 겁이 많은 나에게도 적정 거리가 필요했다. 묘묘도 나도 원하는 적정의 거리에서 마음을 준 것이니 편안하고 좋았다.

전에는 몰랐는데 밥을 먹는 모습을 촬영한 동영상을 보고 묘묘의 귀 한쪽이 잘려 나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길냥이들 중성화시켰다는 표시라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묘묘가 그렇게 되어 있으니 속상했다. 묘묘가 사람을 믿고 유인당해서 중성화받고 귀도 잘리고 했던 경험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경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도 사람을 너무 쉽게 믿고 마음을 내어주었던 것들이 좋지 않은 기억으로 자리 잡아서 지금은 사람을 경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혼자 있는 것이 행복한 지도. 혼자 보낸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도 좋지 않은 기억도 모두 포기하겠다는 선언인 것 같다.


좋지 않은 기억이 쌓이지 않아서 행복한데, 좋은 기억을 쌓을 기회를 놓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묘묘 나는 너의 마음을 존중해. 사람들은 말할 거야 왜 그렇게 경계심을 가지고 사냐고 긴장을 풀고 어울리는 법을 배우라고. 그런데 살면서 다 해보았겠지. 그럼에도 사람을 믿어 보려고 했고 상처로 곪았지만 다시 마음을 내어 주고, 분명 나와 맞지 않는 사람임을 알지만 두루두루 잘 지내보려고도 했지. 다 해보고 난 뒤에 나의 결론은 굳이 맞지 않는 사람과 잘 지내려 애쓸 필요는 없으며 사람과 사람 간에는 적정 거리가 있어야 하고 선을 지키기 위해 거절하는 법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야. 곁에 좋은 사람을 두고 그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고 나를 위한 시간들을 많이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야.

내가 살아온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던 것일까. 사람에게 기대감도 믿음도 없게 만든 내가 산 세상은.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안다. 너무 행복하고 즐겁고 따뜻하고 다정다감했던 사람들과 나눈 것들도 많다. 그런데 늘 그렇듯 부정은 긍정을 압도한다. 그것은 마치 투명한 물에 검은색 물감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순간부터 그것은 검은색 물이 되는 것처럼. 그리고 검은색 물에 아무리 투명한 물을 쏟아붓는다 해도 검은색 물은 검은색 물일 뿐이다. 그 검은색 물감 한 방울을 희석하기 위해 얼마나 맑은 물이 필요하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좋지 않은 기억을 쉽게 털어내지 못하고 그 좋지 않은 기억은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알까기 하듯 불안과 두려움과 의심과 미움 등등을 낳는다. 좋지 않은 기억과 상처를 씻어내기 위해서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좋은 기억들이 필요하다.

묘묘와 나에게도 다시금 두려움 없이 다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어쩌면 지금의 시간들이 그것을 씻어내고 있는 시간인지 모르겠다. 은둔하게 지내고 있는 지금은 나의 정화의 시간이다. 여름에 길을 걷다가 도로변에 피어 있는 나무 밑에 핀 싱그러운 풀잎들을 보았다. 뜨거운 더위와 함께 도로에 지나다니는 차들 때문에 공해도 심할 텐데 어떻게 늘 싱그럽고 푸르게 피어 있을 수 있을까를 생각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한동안 그것을 사색하게 되었는데 내가 내린 결론은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이었다. 아무리 해로운 것이 들어와도 스스로 정화할 수 있다니! 나는 왜 이제껏 살면서 스스로 정화하지 못하고 스펀지처럼 흡수만 하고 살았는가. 내 안에 해로운 것이 들어왔다면 그것들을 정화시켜 내보냈어야 했는데 말이다. 나는 지금 정화시키는 중이다... 얼마나 좋지 않은 것들이 많이 들어왔는지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다. 묘묘에게도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깨끗이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그때에는 너도 나도 경계심 없이 서로를 마주할 수 있겠지?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