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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읽는 사람

by 살라

몸으로 읽는 사람




나는 글을 읽을 때 껴안고 읽는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그 종이 위에 새겨진 문자들이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는 걸 안다. 누군가의 맥박이다. 작가가 새벽에 끙끙거리며 써낸 문장, 눈물과 한숨, 설렘과 분노로 꽉 쥔 손가락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어떤 이들은 정보를 수집하고, 논리를 파악하고, 내용을 정리한다. 효율적이고 깔끔하게. 하지만 나는 온몸으로 읽는다. 피부로, 심장으로, 뒤틀리는 속으로. 그래서 읽고 나면 조금 지친다.

글에서 냄새가 난다. 작가의 땀냄새, 담배 연기, 커피 찌꺼기, 때로는 술 냄새까지.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썼는지, 얼마나 절망했는지가 문장 사이마다 느껴진다. 시인이 쓴 시를 읽으면 단어와 단어 사이,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에서 작가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린다. 소설가의 독백에서는 외로운 밤의 적막이 느껴진다. 칼럼니스트의 날 선 비판 뒤에는 억눌린 울분이 꿈틀거린다. 나는 그 모든 감정을 다 받아낸다. 거부할 수가 없다.

슬픈 구절을 만나면 무의식적으로 손이 움직인다. 종이를 쓰다듬는다. 마치 아픈 사람의 등을 토닥이듯, 울고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듯. "괜찮아, 나도 알아"라고 글 속의 화자에게, 아니 그 글을 쓴 작가에게 전하고 싶은 위로가 생긴다. 때로는 책을, 글을 가슴에 꽉 안고 있기도 한다. 그 사람의 아픔이 너무 생생해서,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책을 다 읽고 나면 몸이 아프다. 어깨가 굽고, 목이 뻐근하고, 가슴이 답답하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고스란히 흡수해서 소화시키느라 내 몸이 지친 것이다. 특히 무거운 주제를 다룬 글을 읽은 후에는 며칠간 그 여운에 시달린다. 작가의 절망이 내 절망이 되고, 그의 분노가 내 분노가 된다. 경계가 희미해진다.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마"라고 스스로 경고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그 글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어 버렸다.

어떤 작가의 글을 읽으면 하루 종일 그와 함께 있었던 기분이 든다. 그가 나에게 속삭인 이야기들, 털어놓은 비밀들, 흘린 눈물들이 내 안에 그대로 남아있다. 마치 친한 친구와 밤새 이야기하고 난 다음 날 아침처럼, 감정이 얽혀있고 피곤하다. 가끔은 그 작가가 실제로 옆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의 시선이 느껴진다. 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는 가장 깊은 교감을 나누었으니까.

내 몸은 글의 모든 진동을 감지한다. 작가의 숨은 의도, 말하지 못한 진심, 억지로 참아낸 울음까지. 행간에 숨겨진 모든 것들이 내 신경을 건드린다. 때로는 작가 자신도 모르는 감정을 내가 먼저 알아차린다. 글 속에 배어있는 외로움, 불안, 그리움 같은 것들을. 그래서 더 아프다. 그 사람의 상처를 그 사람보다 더 선명하게 느끼는 것 같아서.

정말로 아프다. 가슴이 조이고, 목이 메고, 눈물이 난다. 이건 감정이 아니라 물리적 반응이다. 글 속의 아픔이 내 몸에 그대로 각인되는 것이다. 한 번은 민주항쟁을 소재로 한 소설을 읽다가 실제로 가슴이 아파서 병원에 갔다. 다행히 몸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의사는 "스트레스성"이라고 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소설 속 인물의 고통을 내가 대신 앓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 건넨 글을 읽을 때 특히 그렇다. "이거 읽어봐"라며 건네받은 글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함께 들어있다. 왜 나에게 이 글을 주었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가 문장 너머로 전해진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읽는다. 더 아프게 읽는다. 그 사람의 마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온전히 받아내려고.

이런 식으로 읽는 게 비정상적인 건지 모르겠다. 가끔 나 자신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읽지 않는 것 같은데. 하지만 달리 읽을 수가 없다. 이게 내가 세상과 만나는 방식이다. 글을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것.

그래서 책을 읽는다는 건 나에게는 모험이다. 안전하지 않다. 언제 어떤 감정에 휘말릴지, 어떤 상처와 마주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나는 진짜 순간들이 있다. 작가와 나 사이에 흐르는 따뜻한 전류 같은 것들이. 그럴 때면 아프더라도 좋다. 이렇게 깊이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온전히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작가는 독자를 설득시키기 위해 여러 장치를 넣는다는 걸 안다. 치밀하게 계산된 문장의 배치, 감정을 자극하는 단어의 선택,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 이야기의 구조. 그 모든 기법들이 눈에 보인다. 머리로는 "아, 이 작가가 지금 나를 이쪽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구나" 하고 파악한다. 반박할 논리도 충분히 있다.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허점투성이인 주장들도 많다.

하지만 가슴이 허락하지 않는다.

작가의 간절함이 느껴지는 순간, 나는 온전히 설득당하겠다고 마음먹는다. 그의 논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감정이 과장되었다는 걸 눈치채면서도, 그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호소하는데,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무언가를 전하려고 하는데, 내가 차가운 이성으로 방어막을 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기꺼이 속아준다. 작가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그가 원하는 대로 울고, 분노하고, 감동한다.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냉정한 목소리가 속삭인다. "너 지금 조작당하고 있어." 하지만 그 목소리를 무시한다. 이렇게 진심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의심하고 싶지 않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읽는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을, 그 사람의 시간을, 그 사람의 상처를 읽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읽고, 그렇게 아프고, 그렇게 사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속아주고, 그렇게 설득당하고, 그렇게 함께 울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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