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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완벽한 거짓말>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by 허니모카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천재 작가로 대중을 속인 작가 지망생의 이야기이자, 거짓말을 남자와 거짓말을 진실로 알고 있는 여자의 이야기다.


작가 지망생인 마티유(피에르 니니)는 여러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지만,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이 ‘불가능’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의뢰를 받고 빈 집을 청소하다가 오래된 원고를 발견한다. 알제리 전쟁에 참전했던 한 사람의 일기. 눈앞에 총알이 날아들 듯 생생한 표현과 문장은 마티유의 가슴을 뛰게 하고, 작가가 죽은 채 방치된 원고라는 사실은 그의 죄책감을 잠시 눈감게 한다. 결국 자신의 이름으로 원고를 작성한 채 출판사에 보내고, 천재 작가의 명성을 얻는다. 대중은 갑자기 나타난 젊은 작가에게 환호를 보내고, 마티유는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작가가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한 여자(아나 지라르도)와 사랑을 하게 되고, 그녀를 옆에 두기 위해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한 번 시작한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낳아.. 결국 더 이상 어쩌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작가 지망생이 남의 원고를 훔친다는 생각의 발단은 진부하고,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게 되는 전개 또한 뻔하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 뒤가 계속 궁금해진다. 저러다 마티유는 어떻게 되는 걸까. 모든 게 들통나고, 대중과 연인에게서 따가운 눈총과 비난을 받으며 파국에 치닫는 걸까? 결국엔 그러고야 마는 걸까?

마티유는 어느 시점에 진실을 밝혀야 했을까?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을 때? 자신의 거짓말을 아는 사람(원고 주인의 친구)이 나타났을 때? 여자 친구가 점점 더 좋아지기 시작했을 때? 물론 가장 좋은 시기는 사건 직후일 것이다. 하지만 시기를 놓쳤다면, 다음번에 고민이 될 때, 지금은 너무 늦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때, 그때가 그다음보다는 빠른 기회다. 마티유는 애석하게도 계속 기회를 놓친다. 놓친다기보다 스스로 기회를 버린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용기를 내어 진실을 고백하기보다 눈앞의 위기를 모면하는 것에만 급급했다.

작가 지망생에게 천재 작가의 타이틀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쉽게 얻었지만, 쉽게 버릴 순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이상 어떻게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인생을 살 순 없는 법. 그럼 이미 대형 사고를 친 그에겐 몇 가지의 선택이 있을까? 대중에게 진실을 고백하거나, 더 열심히 글을 써서 천재는 아니어도 나름 괜찮다는 말을 듣거나, 여자 친구에게 말하거나, 여자 친구를 말없이 그냥 떠나보내거나.. 혹은 잘못 선택한 길을 되돌아갈 기타 등등의 다른 방법들. 하지만 마티유는 계약금을 미리 받아 다 써버리고, 원고는 채우지 못했으며, 여자 친구에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3년이 흐르는 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아, 이 답답한 사람.

이제 여자 친구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자. 우연히 만난 천재 작가와 연인이 됐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남자가 사실은 남의 글을 훔친 것이며, 자신은 별 볼 일 없는 무능한 사람이라고 고백한다면, 어떨까? 아, 그러셨군요. 제게 사실을 말해줘서 감사합니다. 그리곤 안녕~? 혹은 열심히 해봐, 아자아자! 파이팅? 그보단 배신감에 치를 떨며, 마티유를 벌레 보듯 하고는 뻥 차 버리는 게 더 현실적이다. 반대로 그의 정체를 모른 채 끝까지 대단한 작가로 여기며 산다면, 어떨까? 그게 진실이 아닐지언정.


그녀에겐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한 걸까, 그가 거짓말을 고백하는가가 중요한 걸까?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마티유는 고의적으로 사고를 내고, 세상에서 사라진다. 마티유의 실체는 존재하지만, 천재 작가 마티유는 사라진 것이다. 그가 내린 결론은 세상과 여자 친구에게서 조용히 사라지는 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여자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건넸는데, (형식적인) 그의 사후에 그 소설이 출판되고 호평을 받는다. 모든 것을 고백하듯 써내려간 가면이란 제목의 이야기는 독자들은 상상력으로 비롯된 산물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진정성 덕분인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다. 몇 년 뒤 여자 친구가 마티유의 아이를 안고서 그의 책을 낭독하는 모습을, 마티유가 멀리서 보고는 씁쓸히 자리를 뜬다.


스스로 막을 내린 작가 인생은 한낱 꿈이 되었고, 그는 이름과 존재를 잃었다. 모든 이가 알고 있는 천재 작가의 몰락 인생이 아닌, 아무도 아닌 이름 조차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누구를 위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자신을 위해서? 여자 친구를 위해서? 대중을 위해서?


그렇다면, 여자는 작가 남편의 부재가 나을까, 배신감을 준 남편의 존재가 나을까?



인생을 살다 보면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하나의 행동을 고르면, 그다음엔 그에 맞는 행동들이 선택지에 올라온다. 그리고 앞 행동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제외되는 것들도 있다. 선택지에서 또 뭔가를 고르면, 그다음의 선택지가 펼쳐진다. 그렇게 인생은 여러 가지의 길을 (스스로 혹은 남에 의해) 만들며 흘러간다.



수많은 선택을 하며 지나온 그 길이 항상 옳을 순 없겠지만, 가지 않은 길로 되돌아가고 싶어 지지만 않는다면 그래도 나은 인생이 아닐까.




여자친구가 한 원고를 읽고 했던 말을 덧붙인다.

일류와 삼류는 판단력에서 차이가 나.

일류는 아니다 싶으면 과감하게 버릴 줄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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